화정을 만난 사람들

나는 김병관 회장님이 창을 부르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함께 합창을 한 적도 있다. 김 회장님이 가장 즐겨 부르는 곡은 ‘흥타령’이다. 국창(國唱) 김소희 선생에게서 배운 솜씨 라지만 전문가 시각에서 볼 때 결코 잘 부르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김 회장님의 창 솜씨를 우습게보지 않는다. 속멋이 배여 있기 때문이다. 자신만의 느낌을 가지고 흥타령을 부른다는 이야기다. 흥타령은 곡목과는 달리 한스러운 계면조의 노래다.나는 그분이 왜 하필 이 노래를 좋아하는지를 한동안 궁금해 했었다. 인생행로가 한스러웠을 리도 없었을 텐데…국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 오랜 생각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흥’과 ‘한’은 우리 창에 곰삭아 배어 있는 대표적인 정서다. 국악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는 한 서로 반대되면서도 조화 되는 ‘흥과 한’의 오묘한 이치와 느낌을 알기 어렵다.

김 회장님이 평소 국악에 대해 말하던 바를 되새겨보면서 그분의 국악에 대한 애착과 이해를 다시 확인한다. 나는 그 분이 ‘판소리는 우리 민족의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음악’, ‘창극은 소리 음악 무용 미술 조명이 모두 녹아있는 한국의 종합예술양식’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었다. 김 회장님이 얼마나 많은 국악인들을 격려했고 국악을 위해 얼마나 많은 투자를 했는지 국악인이라면 다 안다.

김 회장님의 국악사랑 중에서도 창작 창극에 대한 지원과 투자는 남다른 대목이 있다. 그분은 창작 창극에 투자했을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에 직접 참여해서 의견을 내놓을 때도 많았다. 창작 창극은 기존 창극과는 달리 노력이 많이 들어갈 뿐만 아니라 공연의 성공 여부를 확신하기도 힘들다. 우리 창극을 오페라나 뮤지컬처럼 세계적인 장르로 끌어올리려는 큰 뜻이 없는 한 선뜻 투자할 생각을 하기가 어렵다.

김 회장님은 창작 창극의 소재로 항상 녹두장군과 홍범도 장군, 윤봉길 의사 등 민족적인 인물의 생애를 선택했다. 이는 민족에 뿌리를 둔 동아일보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서 김 회장님이 국악 발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 깊이 감사한다.

김 회장은 얼른 뵈면 단순하고 직선적이고 과묵했다. 그런데도 사람을 끌어들이는 폭이 넓었다. 아무리 따져 봐도 무슨 인연인지를 모를 그런 사람들을 두루 챙겼다.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마음은 포근해 심우(心友)들이 많았다.

1997년인가, 정초에 김 회장이 감옥에 있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면회했다는 얘기를 누군가 귓속말로 전해줬다. 동아일보는 지난 날 군사정권과는 늘 불편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전두환 정권도 예외가 아니다. 그 고생, 고생한 일들을 접어두고 면회를 가다니…가당치도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김 회장은 누가 뭐라 하던 면회를 갔다. 먼저 용서하는 사람이 최후의 승리자라는 교훈을 조용히 보여준 것이다.

나는 신문협회 책임을 맡았던 인연으로 언젠가 김 회장에게 국제적인 언론인의 역할을 맡을 것을 제의했다. 명예로운 자리이기 때문에 선뜻 수락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한마디로 사양했다. “그 일은 나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맡아야 하는 것 아니냐?” 김 회장이 나설 자리와 나서지 말아야 할 자리를 엄격히 가린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나는 좀 멋쩍었다.

김 회장은 평소 말이 별로 없었다. 가만히 듣는 쪽이다. 회의석상에서도 그렇다. 하지만 중요한 회의에서는 미리 준비해둔 메모를 보며 발언했다. 말재주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다. 중요한 일, 자신의 의견을 분명히 개진해야 할 문제엔 한마디의 허실도 없게 기록을 해가지고 말했다. 그런 치밀하고 무서운 구석이 있었다.

1996년 김 회장이 오명 전 장관을 동아일보 사장으로 발탁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오 사장은 언론인도 아니요, 동아일보의 이미지와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분이기에 설마 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소문이 현실로 나타났다. 오 사장 영입은 김 회장의 깊은 생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동아일보가 낡은 껍질을 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김 회장은 마음 속 깊은 곳에 각본을 써놓고 있었던 것 같다.

김병관 회장님은 평생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을 실천했던 인촌 김성수 선생과, 섬세함과 치밀함으로 언론 발전을 주도하셨던 일민 김상만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오직 동아일보 중흥을 위해 솔선수범으로 일관된 삶을 살아오신 분이다.

김 회장님과의 인연은 내가 1976년 말경 동아일보 간부 연수교육에 강사로 초빙됐을 때 시작됐다. 신문사 경영에 도움이 될 만한 조언을 해달라는 한 참석자의 요청에 나는 “독자들이 많이 보는 4단 만화 밑에 광고를 게재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말했다. 당시 동아일보 광고국 부국장으로 재직하고 계시던 김 회장께서는 다음날 바로 4단 만화 하단에 광고를 싣는 신속함을 보이셨다. 흘려듣기 쉬운 사소한 모티브조차 지면에 반영하는 모습을 대하며 동아일보 발전에 온 정성을 다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할 수 있었다.

김 회장님은 외모에서 풍기는 근엄함과 달리 주변을 편안하게 이끄는 호방한 분이셨다. 1998년 여름 대우가 세운 복합문화공간인 아트선재센터를 개관했을 때 보여주신 호방함은 특히 잊혀지지 않는다. 야외에서 열린 이날 개관식은 가늘게 내리는 빗줄기로 인해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행사를 주최하는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그때 김 회장님께서 성큼성큼 행사장 중앙으로 걸어 나가 “서울 한복판에 문화공간을 새로 여는 축일에 한판 춤이 없어서야 되겠느냐”며 멋들어진 춤사위를 펼쳤다. 이어 미술계 원로 김응수 화백까지 화답하고 나서자 모든 이의 어깨춤이 절로 나왔고 덕분에 신명난 개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여기에 하나하나 풀어쓸 수 없지만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언론정신으로 난제 해결의 실마리를 열어주셨던 값진 고언(苦言)들은 더욱 더 고마운 기억으로 남는다.
김 회장님은 넉넉한 풍모와 덕담으로 편안함을 이끌어내는 우리 사회의 어른이자 난국마다 따가운 조언을 마다하지 않는 원로언론인이셨다.

김병관 회장과는 선대부터 세교(世交)가 깊었다. 인촌 선생과 선친의 교류가 깊었으며 일제치하에서도 집안 간에 만남이 잦았다.
서울대 총장시절부터 김 회장을 바로 곁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때로는 술자리에서 혹은 운동을 하면서 함께했던 순간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를 생각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김 회장을 만날 때마다 ‘진정한 명문의 후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다고 해서 우월의식에 젖어있다면 명문이 아닐 것이다. 상하 간에 두루 친하면서 다른 사람의 사정을 살피고 사람을 아끼는 것이 진짜 명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 회장은 명문가로서의 풍모를 지켰다.

사실 우리에게는 진정한 명문의 존재가 아쉽다. 부를 남보다 많이 쌓았다고 해서 스스로 뛰어나다는 우월의식을 갖고 있거나 허장성세에만 능한 사람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김 회장은 진정한 명문의 가풍을 이어받았으며 큰 사람으로서의 풍모를 한결같이 보여주는 사람이었다.
우선 김 회장은 잘난 체 아는 체를 안 했다. 사회 전체를 꿰뚫어보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탁월한 통찰력과 안목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난 체 하지 않는, 참으로 우리 시대에 드문 분이었다.
호방하면서도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는 것도 김 회장의 덕목 중 하나다. 한마디로 김 회장에게서는 세속적인 틀을 넘어선 거인의 풍모를 느낄 수 있었다. 권력이 있다고 그 앞에서 절대 굽히지 않고 약하다고 무시하지 않는 그의 성정(性情)은 다른 사람들이 감히 흉내 내기 어려운 것이다.
요즘같이 애국심이 진부한 것으로 치부되는 세태 속에서도 진정한 애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큰 기둥이 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