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덕룡
김덕룡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
화정(化汀) 김병관 선생은 동아일보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동아일보는 그에게 3대를 이어온 영광스러운 가업이자 벗어던질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였습니다. 할아버지인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때부터 일제강점기와 이승만의 백색독재, 박정희 전두환의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 등 격동의 역사를 헤쳐 온 유서 깊은 신문의 운영을 책임지는 중압감으로부터 잠시라도 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생은 평소 소탈하고 검소한 생활을 즐겼지만 유독 언론에 있어서만은 상당히 엄격했던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1987년 화정 선생이 처음 동아일보의 발행인이 되었을 때,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 화정 선생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회유와 협박에도 불구하고 기자들로 하여금 권력에 굴하지 말고 성역 없이 공정 당당하게 보도하도록 격려하고 밑받침하여 마침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밝혀지고, 이른바 6월 항쟁이 국민의 위대한 승리로 끝나게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평소 술을 좋아했지만, 취중에도 편집국장 등이 신문 편집과 보도문제를 상의해 오면 공정하고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처리하도록 냉정하게 지시했다고 들었습니다. 함께 술을 마시다 잠을 자는 경우가 있었는데 자다가도 남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 벌떡 일어나 “왜 내 욕을 하냐!”고 소리치는 모습은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함께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태생부터 생리 자체가 언론인이었으며, 너무도 인간적인 분이셨습니다.

화정 선생은 항상 웃는 낯빛이었고 사람을 만나면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 두고 싶어서 안달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화정 선생의 표정은 언제나 천진난만, 다소는 장난기까지 있어 짓궂다거나 싱겁다는 인상을 받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친화(親和)와 애정의 따뜻한 표현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1983년 5월 18일, YS의 23일에 걸친 무기한 단식투쟁에서 비롯된 민주화투쟁은 1984년 5월 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 결성, 1985년 1월 18일 신한민주당 창당과 2·12선거혁명을 거쳐 천만인 개헌서명운동과 개헌운동 현판식으로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그리고 1987년 1월 14일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일어나 다시 한 번 민주화운동의 불길을 끌어올리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때 언론, 특히 동아일보의 보도가 이 불길을 일으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 못한 전두환 정권은 ‘4·13호헌조치’로 오히려이 불길에 기름을 부었고, 이에 5월 27일 재야와 통일민주당이 서로연합하여 범국민적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해 단일목표, 단일대오로 민주투쟁을 전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가 한국의 민주화투쟁사에서 재야와 야당 세력이 힘을 합하여 마침내 ‘6·29선언’을 이끌어 낸 가장 장엄한 투쟁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국민운동본부를 중심으로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 범국민대회’라는 긴 이름을 가진 집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고, 이날의 시위는 전국 22개 도시, 514곳에서 총인원50여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전개되었습니다. 서울만 해도 30여 군데에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의 영수회담이 열렸습니다. 여기서 김영삼 총재는 청와대가제공하는 비표(秘標)를 거부하고 들어가 “계엄 등 어떠한 비상조치도자멸로 가는 길이다. 민주화와 직선제의 수용만이 나라가 살고 당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대통령의 확답을 요구했고, 끝내 확답을 듣지 못하자 결렬을 선언했습니다.

이에 국민운동본부는 6월 26일 예정된 평화대행진을 전국 34개도시와 4개 군, 270여 곳에서 진행했고 100만 명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6·29선언’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1987년 6월 마침내 민주화를 쟁취하고 나서 이제 남은 문제는 87년 체제로의 헌법 개정과 야권 후보 단일화 문제였습니다. 헌법 개정은 정치권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될 문제였고, 야권 단일화는 그 무엇보다도 절박한 문제였습니다. 고백하거니와 김영삼 총재와 저는 김총재가 후보가 되는 것이 역사의 순리요, 정도라고 보았습니다.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끌기까지의 전 과정에서 맨 앞에 섰던 지도자가 김영삼 총재요, 민주당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86년 11월 5일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수락한다면 비록 사면복권이 되더라도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김대중 선생은 6·29선언 이후에 말을 계속 바꾸었고 ‘모든 요구 조건을 다 수용할 테니 경선을 통해 서둘러 단일화를 하자’는 김영삼 총재의 제안을 뿌리치고 10월 30일 신당 창당과 자신의 대통령 후보 출마를 공식 선언함으로써 후보 단일화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양김의 분열은 야당 세력의 분열은 물론이고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의 분열, 더 나아가서는 지역감정으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사자필승론(四者必勝論)’이니, ‘비판적 지지’니 하는 궤변이 쏟아져 나온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그리고 언론조차도 이러한 분열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입니다. 화정 선생이 평소와는 달리 정중하게 만나달라는 간곡한 청을 제게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약속에 흔쾌히 응했지요. 거기서 화정 선생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우리 동아일보 기자들의 개개인 입장은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동아일보의 특성상 아마도 김대중 선생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오늘의 민주화를 쟁취한 김영삼 총재를 인정하고 좋아한다. 그러나 신문의 논조만은 중립을 지킬 것이니 이를 분명히 알아 달라. 그리고 김영삼 총재에게도 그 뜻을 전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당신이 보여주었던 그 진지한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처럼 김영삼 총재와 저 그리고 우리 민주당 동지들의 민주화투쟁을 깊이 이해해 주고 있는 것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생각할 때면 그때의 그 진지했던 표정이 다시 떠오릅니다.

2002년으로 기억됩니다. 미주이민 100주년을 맞아 기념행사가열리는 하와이를 화정 선생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며칠을 함께 지내면서 술자리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93년부터 세계한인상공인총연합회를 설립하여 운영해 왔고 2002년에는 세계한민족공동체재단을 창립하는 등 해외동포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화정 선생께서 해외동포 문제에 그토록 관심과 조예가 깊은 것을 확인하고는 놀라기도 하고 적지 않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화정 선생이 안타깝게 부인상을 당했을 때 문상을 간 저를 붙잡고 ‘내가 외롭고 허전해서 그러니 조금만 더 있다 가라’며 새벽까지 당시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사무실에서 함께 통음을 했던 그 인간적인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언론인으로서는 엄격하고 강직했으나 오히려 그 중압갑을 털어내기 위해 항상 소탈하고 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성정을 지니셨던 화정김병관 선생이 오늘 새삼 그립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