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진호
김진호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인촌 김성수 선생 일가와의 인연은 내가 고려대에 입학한 후 럭비부에 입단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거기서 인촌 선생 막내아들인 김상겸을 처음 만났다. 김상겸 선배의 조카였던 김병관 선배는 학교 시절엔연배의 차이가 있어 만날 기회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ROTC 장교로 임관한 뒤 육군 소장이 되어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장으로 재직하던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의군 부재자 투표에서 부정이 있었다는 양심선언이 나왔다. 양심선언을한 이모 중위는 백마사단 소대장으로 공교롭게도 나와 같은 고려대ROTC 출신이었다. 당시 군은 선거에 관한 한 엄정한 중립을 지키도록 지침을 하달하였음에도 예하 부대에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자 정부는 정치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되었다. 군은 사건 경위를 신속히 파악하고 이를 언론에서 공정하게 다뤄줄 것을 요청하는 사절단을 편성했는데, 고려대 ROTC 인맥을 고려하여 내가 책임자를 자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었던 홍인근 선배를 만나 “예하 하급제대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과잉 충성 행위일 뿐 군 고위당국은 일절 선거 개입이 없었다”는 군 입장을 전달했다. 이에 홍인근 선배는 기왕 신문사를 방문했으니 사장님을 뵙자고 했고 그때 화정 김병관 선배를 처음 만났다. 이미 언론을 통해 김 선배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날의 첫인상은 부친이신 일민 선생보다 김 선배가 더 인촌 선생의 외모를 빼닮았다는 느낌이었다. 근엄한 자세이지만 자상한 눈빛으로 후배인 나를 맞아주었다. 방문 경위를 설명하자 군의 정치적 중립과 언론의 사명에 대해 강조하고 공정보도를 약속했다. 그 이튿날 동아일보 1면에 ‘군의 소장급 장교들이 군 부정선거 사실이 지나치게 왜곡 보도되는 데에 대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보도되었다. 동아일보 입장은 ‘군의 선거 부정은 용서할 수 없다. 그러나 지나친 보도 경쟁으로 군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 선배의 말씀과 일맥상통했다.

군에 재직하는 동안 김 선배를 만날 기회는 없었다. 하지만 예편한 뒤에는 신년 하례 등 각종 행사에서 자주 만나면서 각별한 선후배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작고하실 때까지 불과 몇 년의 교분을 가졌던 사람이 한 인물을 이렇다, 저렇다 평가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그래도 김 선배를 말하라 한다면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다. 근엄하면서도 천진난만하고, 권위적이고 고집불통에 심술이 있는가 하면 약자를 배려하는 자상함과 이해심이 깊었다. 입가에 흐르는 잔잔한 미소. 그것이 인간 김병관이라고 말하고 싶다.

군에서 예편하고 한국토지공사 사장을 할 때 동아일보가 주관한 한 행사가 끝나고 김 선배와 술을 마시게 되었다. 김 선배가 “김 사장! 술 한잔해” 하며 내게 술잔을 건넸다. 내가 “아니, 군인 보고 김 사장은 무슨 김 사장입니까”라며 싫은 표정을 짓자, 김 선배는 짓궂게 웃으며 “아차, 내가 실수했어! 김 장군님 한잔하세요”라며 말을 바꿔 좌중을 웃겼다. 정초에 가회동으로 신년 인사를 가면 김 선배는 내게 거수경례를 하곤 했다. 동아일보 간부, 고려대 임직원들에게도 “장군 호칭을 해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후배에 대한 배려를 익살맞게 표현한 것이었다.

2006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들 집에 묵고 있을 때였다. 김병관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국 여행을 하려는데 함께하자며 여행 일정표를 짜보라는 것이었다. 김 선배의 일행 몇 명과 함께 미국의 솔트레이크시티에서 라스베이거스를 거치며 골프도 하고 카지노에서 블랙잭도 했다. 그런데 멕시코로 가기 위해 샌디에이고로 이동하던 중, 멕시코행을 놓고 서로 의견이 갈렸다. 서로 옥신각신하던 중 감정이 격해진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에 함께 있던 일행이 밖으로 따라 나와 나를 다시 자리로 이끌었다.

부처님 같은 자세로 미동도 않고 앉아 있던 김 선배는 “김 장군이왜 국방장관이 안 되었는지 이제 알았소. 그 성깔머리를 누가 장관 시키겠소”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선배의 의연한 태도와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는 말투에 더 다툴 마음이 없어지고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니, 그걸 후배에게 말이라고 합니까?”라고 항변하곤 그걸로 논쟁을 끝냈다. 까마득한 후배가 한 행동을 격한 말로 나무랄 수도 있었으련만 철없는 아이의 투정으로 받아 준 김병관 선배의 대범함과 넉넉함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온 후 김병관 선배와 격의 없이 지내던 오정소 전 보훈처장이 여행이 재미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김선배와 괜히 여행 가는 바람에 티격태격만 하고, 다시는 나를 안 볼것 같다”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오 전 처장이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분 속 좁은 분 아니야.”

나는 그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며칠 후 김병관 선배로부터 전화가왔다. 아프리카 여행을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미국 여행에서 있었던 일로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는데, 나도 마음이 편해져서 김병관 선배일행과 함께 2주 동안 사파리 여행을 가기로 했다. 김 선배는 당시 동행했던 단체 여행객들에게 본인을 소개했다. 최연장자였던 김 선배는 겸손한 처신으로 단체 여행객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러자 여행객들은 “저분 언론에서 보니 대단하신 분이던데 굉장히 소탈하고 서민적이시네”라며 기념사진을 함께 찍기도 했다.

나는 지금까지 65년 동안 동아일보 애독자이다. 김병관 선배가 동아일보 명예회장 퇴임사에서 밝힌 것처럼 동아일보는 일제강점기 각종 탄압에서 민족의 자존을 지켰고 또 광복 이후 권력의 회유와 탄압에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한국의 대표 신문이다. 오늘의 동아일보는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 일민 김상만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과 동아일보 전·현직 가족의 피와 땀의 결과이다. 이제 다음 세대의 퇴임사에선 인촌, 일민에 이어 화정이 동아일보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사실을 평가하게 될 것이다. 학교 후배가 아닌 평생 독자로서 나는 이를 확신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