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한동
이한동전 국무총리
화정과 나는 34년생 동갑이다. 화정의 생일이 서너 달 빨랐지만, 친구처럼 가깝게 지냈다. 내 친구가 화정의 친구와 겹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이 식사도 하고 더러는 골프도 쳤다. 그때도 서울 근교 골프장에서 화정과 운동을 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어느 날 화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아무래도 운동이 어려울 것 같아요.” 그것이 화정과의 마지막이었다.

화정의 사무실에 가면 ‘공선사후(公先私後)’ 액자가 걸려 있었다.화정은 그것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그렇기에 권력 앞에 비굴하지 않고 항상 당당했다. 그는 한 시대의 거인이었지만, 서민적 풍모도 잃지 않았다. 그것은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것이다.

내가 화정에게 직접 들은 얘기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일제가 서울 인구를 대거 지방으로 소개(疏開)시켰다. 연합군의 서울 폭격으로 위험하기도 했지만, 일제가 서울의 밀집 지역을 헐고 소방도로 같은 것을 만들기도 했다. 내가 살던 경기 포천에도 많은 서울 사람들이 연고를 찾아서 왔다.

서울 계동의 재동국민학교를 다녔던 화정도 1943년인가, 가족과 헤어져 단신으로 전북 고창에 내려갔다. 고창국민학교로 전학 간 화정은 일제강점기 말 우리 농촌의 참담한 현실을 보게 된다. 학생들은도시락을 싸올 형편이 못 돼 점심시간이면 들판으로 나가 풀을 뜯어먹거나 소나무 껍질, 칡뿌리 등을 먹었다는 것이다.

가난한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며 화정은 차마 자신이 싸온 도시락을 꺼내지 못했다고 한다. 친구들과 풀뿌리 같은 걸 함께 먹고, 그나마 없으면 같이 굶었다고 했다. 화정은 거기서 광복을 맞았지만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어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고창국민학교를 졸업했다. 타고나기를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많은 사람이었다.

바로 그런 마음이 커서도 어려운 사람을 이해하고 도와주며, 고통받는 사람들 편에 서게 만든 것이다. 화정의 집안 내력으로 보면 정통보수의 길을 걸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사상적으로 진보적인 편이었다. 힘든 사람들에게 따뜻한 화정의 마음 씀씀이가 그런 진보적인 생각으로 이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 화정한테 이런 일화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로 돌아와 중학교를 다니던 화정이 이번에는 6·25전쟁으로 다시 고창으로 피란을 가게 됐다. 하지만 고창까지 인민군이 쳐들어오자 지주 집안의 장남이던 화정은 머슴 집으로 숨었다. 시골에는 머슴이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소탈했던 화정은 평소 머슴과 격의 없이 친구로 지내던 터였다.하지만 화정은 발각돼 인민재판에 넘겨질 위기에 처했는데 마침 머슴의 형이 인민위원회 간부였다. 머슴이 형에게 울면서 “병관이는 지주아들이지만 늘 나를 챙겨준 착한 친구니 제발 살려 달라”고 매달려 위기를 넘겼다는 것이다. 서민에게 따뜻했던 화정의 인품은 소작인의어려움을 돌봐주고 아랫사람에게 관대했던 인촌가의 가풍과도 관계가 깊다.

화정이 참으로 어려웠던 시기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 들어 동아일보에 대한 보복성 세무조사가 있었고, 그로 인해 본인이 구속까지 됐다.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참담한 불행도 겪었다. 마침 내가 국무총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국세청장이 내 방으로 찾아와 한 장짜리 보고서를 내밀었다. ‘동아일보 세무조사가 특별한 것은 아니고, 5년마다 하는 정기 세무조사의 일환’이라는 내용이었다. 화정과 사돈 관계인 나로서는 ‘정부에 계속 몸담고 있어야 하나’를 고뇌한 참으로 힘든 시기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도 화정은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속으로 얼마나 고통과 번민이 많았겠는가. 화정은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잔정이 많고, 정에 약한 분이다. 국악 지원 사업도 꾸준히 했는데, 인촌 집안이 대대로 문화사업을 지원해온 가풍에 따른 것도 있지만, 화정은 “국악이 얼마나 어려워”라고 말하곤 했다. 어려운 문화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측은지심의 발로였다.

그러면서도 화정은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10년, 20년 앞을 내다보며 판단하곤 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 동아방송을 강탈당한 일을 천추의 한으로 삼았던 화정의 정신이 이어져 오늘날 동아일보가 채널A 방송 사업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언론사업에서는 물론이고 고려대 이사장으로서 학원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눈앞의 이해관계보다는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보곤 했던 인물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