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어윤대
어윤대전 고려대 총장
세월은 ‘흐르는 강물처럼’ 참으로 빠르다.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이사장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 지도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그 시절이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화정 선생이 고려중앙학원의 이사장으로 계셨던 1999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은 고려대의 혁명기였다. 당시는 고려대가 민족의 대학을 넘어 세계적인 대학으로 위상을 정립시켰던 기간이다. 교육 시스템을 국제화하고, 교육 공간과 학생 편의시설을 획기적으로 확충하면서 친환경캠퍼스를 구축했다. 외국어(영어)로 강의하는 수업 비중을 40%로 크게 늘려 고려대생들의 국제적인 의사 전달 능력을 키우게 하였다. 세계적인 인재가 될 수 있는 기초를 구축한 셈이다. 800개가 넘는 외국대학 및 연구기관과 학술교류를 체결하여 고려대생의 25%가 외국 대학에서 한 학기 이상 강의를 받게 만들었다. 교수도 30% 이상 증원하여 교육 중심에서 과학 중심, 연구 중심 대학으로 변화를 시작하였다.

화정 선생의 결단으로 고려대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대운동장을 과감하게 헐어내고, 그 자리에 지하주차장과 각종 편의시설, 잔디공원이 있는 중앙광장을 준공시켰다. 교우의 기부로 30m가 넘는 아름드리 소나무 250그루를 정문 좌우에 이식하는 등 국내 대학 최초로자동차가 없는 쾌적한 캠퍼스 환경을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이과대,공과대, 생명환경대 앞 광장을 공원화하고, 지하에는 도서관과 학생용 편의시설을 갖춘 하나스퀘어를 만드는 대공사를 완수했다.

녹지운동장 뒤에는 연면적이 장충체육관의 1.7배나 되는 실내체육관을 만들었다. 평소 당신은 자신을 잘 드러내시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화정 선생이 세상을 뜬 후에 이 체육관은 그의 아호를 따서 ‘화정체육관’으로 명명되었다. 특히 여름학기에 강의하는 외국인 교수를 위해 CJ 인터내셔널 하우스를 건립하면서 국제화 준비도 해나갔다. 2005년 100주년을 맞아 재단의 적극적인 펀드레이징 캠페인으로100주년 기념 삼성관을 지어 박물관으로 조성했다. 이렇게 만든 새박물관은 한국 대학 박물관 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의 결과로, 영국 타임지가 실시한 2005년 세계 대학평가에서 고려대가 드디어 세계 200대 대학에 진입하게 되었다. 화정 선생께서 명예법학박사를 받은 와세다대나 게이오대 등 일본 유명 사립대보다도 먼저 세계적인 대학으로 평가를 받고,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2016년 현재, 고려대는 영국 대학평가기관인 QS(Quacquarelli Symonds)에서 세계 대학 90위로 평가받았고, 전체 46개 세부전공 평가 중 8개 분야가 최고 수준인 50위이내로 진입하였다.

나는 1963년 고려대에 입학하고 1979년 고려대 교수가 되면서 줄곧 ‘고대맨’으로 성장했지만 2003년 고려대 총장으로 행정직을 맡기 전까지는 화정 선생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개교기념일 등 학교 행사 때 축사를 듣는 정도였다. 나의 내향적인 태도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남 앞에 잘 나서지 않으려는 화정 선생의 겸손한 스타일 때문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15대 총장으로 부임하게 되었을 때 당시 총장대행으로 계시던 한승주 교수가 행정 인수인계를 하면서 대학과 재단의 관계를 설명하여 주었다. “재단은 원칙적으로 학사행정을 대학에 위임하고, 특별한 일이 아니면 관여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어 총장은 (화정 선생과) 나이 차이가 좀 나는 후배이니 잘해 주실 것”이라고 농담도 하였다. 재단이 학사 행정에 깊이 관여하는 다른 국내 사립대들과는 달리 고려대는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해 주는 전통이 확립되어 있었다. 나로서는 능력은 부족하지만, 인촌 김성수(仁村 金性洙) 선생의 공선사후(公先私後)의 가르침대로 학사행정을 원칙에 따라 열정을 가지고 경영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화정 선생은 과묵하셨다. 총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당시 화정 선생이 명예회장으로 계셨던 동아일보사로 인사를 드리러 간 적이 있다.나는 화정 선생께서 대학 운영의 철학이나 정책을 말씀하실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반갑게 악수를 하곤 “열심히 하시오”라는 단 한마디가 전부였다. ‘내가 총장이 되어 혹시 못마땅하게 여기시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물론 그것은 오해였고, 화정 선생은 매사에 진중하고 말씀을 아끼셨다. 고려대 역사상 가장 큰 행사였던 2005년 고려대 100주년 기념식을 준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성공 여부에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대학에 모두 일임하여 주었다. 나는 화정 선생의 성품이 3·1운동 등 큰일을 하시면서 항상 조용히 뒷바라지만을 했던 조부 인촌 선생의 성품과 일맥상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화정 선생은 판소리를 즐기시는 풍류객이었다. 100주년 행사를 성황리에 종료한 후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주관의 축하행사를 가졌다. 며칠 전 세계 150개 세계대학총장회의를 대통령의 축사로 시작한 바로 그 장소였다. 참석자가 200여 명으로 기억되는데, 그날 기분이 좋았던 화정 선생께서 판소리 한 자락을멋지게 부르셨다. 아마추어 수준을 뛰어넘는 부드러운 목소리의 명창이었다. 참석한 교수들은 화정 선생의 예기치 못한 예술적 역량에 감탄하였다. 그 후 다른 모임에서 판소리 명창 김소희 여사가 화정 선생을 만나서 반갑게 인사하고 팔짱까지 끼는 것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훗날 알고 보니 화정 선생은 김소희 여사에게서 판소리를 사사(師事)하였다.

화정 선생은 한식을 즐기셨는데, 특히 서울시청 뒤 참숯골 갈비를 자주 찾으셨다. 나와 식사 약속이 있을 때는 항상 동아일보 사옥에서 혼자서 걸어 오셨다. 약주를 즐기셨던 당신은 반드시 반주를 하셨다. 그런데 나는 원래 술이 받지 않는 체질이다. 대학에서 행정을 맡은 후 필요와 강요에 의해서 자의 반 타의 반 마지못해 술을 먹기 시작했을 정도이다. 이런 연유로 당시 내가 화정 선생을 모시고 식사할 때에는 당신에게 식사 자리의 흥을 북돋아 드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 나의 걱정을 씻어준 기회는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초청 일본 가고시마 여행이었다. 그동안 고려대에서는 1년에 한 번 서울 근교에서 워크숍 형식으로 교수 전체회의를 여는 관례가 있었다. 나는 고려대 개교 100주년(2005년)을 앞두고 심기일전하기 위해 교수 회의를 제주도에서 열었고, 2004년도에는 사상 처음으로 교무회의를 해외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런 소식을 들은 화정 선생은 가고시마에서 재단 이사와 교무위원 합동 정책, 전략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하셨다. 회의 마지막날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 초청 만찬이 있었다. 재단 이사장이신 화정선생과 총장인 나를 위시하여 재단 이사들과 학교 교무위원들이 만찬장에서 자연스럽게 마음껏 약주를 돌리며 격의 없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누고, 우의도 더욱 돈독하게 다졌던 기억이 생생하다.

화정 선생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신봉자이기도 하셨다.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재단에서는 대학에 학사행정을 전적으로 위임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교무위원을 임명할 때는 함께 검토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화정 선생이 이사장으로 계시고, 내가 총장으로 재임하는 4년 동안 재단 측에서 교무위원을 비롯한 단 한 건의 교수 임명에도 반대를 표명한 적은 없었다. 나아가 관심을 갖고 있는 후보자의 이력서를 내려보 낸 적도 없었다. 예외적으로 딱 한 번 당연직 교무위원인 모 단과대 학장 자리에 어떤 교수를 임명하려고 했을 때, “그 교수가 시장경제주의자인가?” 하는 의문을제기한 적은 있다. 당연히 그가 반(反)시장경제주의자라는 오해는 풀렸고, 그 교수는 학장직을 탁월하게 잘 수행하여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2006년 12월 20일, 나는 15대 총장 임기를 마치고 안암캠퍼스에서 교직원들과 송별식을 가졌다. 교정을 떠나면서 바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 중이신 화정 선생의 병실을 방문하여 총장 임기를 마친 것에 대한 종료 인사를 했다. 취임 시와 마찬가지로 그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나직한 목소리로 하시는 것이었다.

화정 선생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다. 지금 내 나이는 화정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와 비슷한 연배가 되었다. 가끔씩 골프를 치며 최근에는 영시(英詩)도 공부하면서 소일하고 있다. 2년 전에는 뉴질랜드퀸스타운에서 번지점프도 했다. 10여 년 전 화정 선생을 모시고 한국대학의 변화와 개혁을 위해 일하던 그 시절, 일에만 몰두하느라 조금 더 여유를 보이면서 화정 선생의 풍류에 답하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큰 회한(悔恨)으로 남는다.

이제 나는 시간적 여유도 많고 제법 약주도 할 수 있다. 그럴수록 평창 겨울올림픽이 열리는 경관 좋은 오대산에서 화정 선생을 모시고한우갈비에 막걸리나 ‘라 카르돈’(고려대 개교 100주년 기념와인)을 같이하면서 세상 걱정이나 성공한 교우들의 덕담을 함께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참으로 안타깝다.

이태백의 ‘술잔을 잡고 달에게 물어본다(把酒問月)’라는 노래처럼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우리는 이제 그 옛날의 달을 보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달이 비추었던 옛사람, 즉 화정 선생을 기억하는 우리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저 달을 바라보는 마음처럼 한결같고 풍성할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