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오다가와 고 小田川興
오다가와 고 小田川興전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
화정 김병관 선생에게서 저는 세 가지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우선 아사히신문 서울지국장 및 외보부(국제보도부)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고, 둘째, 선생이 고려대에 창설하신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 자문역으로 초빙됐습니다. 셋째, 와세다대와 고려대의 ‘한일(일한) 성신(誠信)학생통신사’ 교류 사업을 선생이 남기신 화정평화재단의 큰 지원을 바탕으로 현재도 주재하고 있습니다.

성신학생통신사는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받는 교류를 전개해 왔습니다. 2017년 10월 31일 유네스코는 한일이 공동으로 신청한 조선통신사를 세계기록유산에 등재했습니다. 이는 2002년 한일 공동월드컵에 필적하는 쾌거입니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는 조선통신사의 ‘성신’교린의 정신을 이어받는 한일 성신학생통신사에도 큰 힘이 됨과 동시에 학생들을 지도하는 제 가슴에 선생의 ‘공선사후’ 정신을 되새기게 해줬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였던 저는 위성신문 현지 데스크로서 동아일보에 많은 신세를 졌습니다. 이 위성신문은 통신위성을 통해 도쿄 본사로부터 특별지면을 동아일보 여의도 인쇄공장에 보내 올림픽 경기장만이 아니라 서울 주재 일본인이나 기업에도 배달하는, 한일 미디어를 통틀어 처음 벌인 실험적인 사업이었습니다. 경쟁지인 요미우리신문이 ‘위성판’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고속팩스로 지면을 보내는 대응책에 나선 것은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의 연대에 압도됐기 때문입니다. 서울 올림픽 때 위성신문 경쟁에서 아사히신문이 완승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일보의 편집 인쇄 판매 광고 등 전 부문에 걸친 전면적인 협력과 무엇보다 당시 발행인으로서 진력해주신 선생의 덕분입니다.

저는 서울특파원 당시 선생으로부터 미디어가 실천해야 할 신조로 사형 폐지 운동에 대해 배웠습니다. 어느 날 선생께서 부르시길래 찾아뵈니 이상혁 변호사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당시 일본에도 사형폐지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있었지만 실현은 먼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장인 이상혁 변호사는 “사형 제도가흉악한 범죄를 줄이지는 못한다”고 명언했습니다. 이윽고 2007년 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인터내셔널)가 한국을 132번째 사형 폐지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이상혁 회장의 노력, 그리고 언론계에서 사형 폐지를 선구적으로 주창하신 선생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신념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직도 사형 폐지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선생이 계셨더라면 “일본을 사형이 없는 인권 국가로 만드는 것이 보도의 사명”이라며 꾸지람을 하실 것 같습니다.

‘민중의 표현기관을 자임’하는 동아일보의 존경스러운 기자들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얻은 것은 제 자랑입니다.

한일 월드컵이 다가오는 2001년경, 선생은 정년을 앞둔 제게 “와세다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것을 기념해 고려대에 새로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를 만들 테니, 그곳의 자문역이 돼 달라”고 권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인촌기념관, 나중에는 국제관으로 자리를 옮긴 연구소에서 윤영섭 소장(경영대 교수)의 따뜻한 배려 하에 저는 국제 심포지엄 개최를 위해 일본 참가자를 선정하고 섭외하는 일을 했습니다.

심포지엄은 금융이나 에너지 문제 등 여러 분야의 주제를 정하고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의 전문가를 불러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동북아경제경영연구소는 경제력이 커진 한국이 다음 단계로 올라서기 위한 기반 만들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와세다대와 고려대의 ‘한일 성신학생통신사’ 프로그램은 선생이세우신 동아일보 부설 화정평화재단의 큰 지원에 힘입어 많은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시작은 19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해 아사히신문과 동아일보가 ‘전후 50주년 기념 한일 교류-과거에 입각한 미래에의 제언’ 논문을 현상 모집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일 양국에서 모두 243편이 응모했습니다. 아사히신문 편집위원이었던 저는 1차 심사를 하면서 한일의 풀뿌리 교류가 역사의 골을 뛰어넘는 열쇠가 된다고 확신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제가 와세다대 아시아연구기구의 객원교수가 된 2006년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한류 붐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양국의 역사를 빼놓고 피상적인 교류에만 빠진다면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우려해 한일 대학생 교류를 하기로 한 것입니다.

2006년 12월 오쿠시마 다카야스(奧島孝康) 전 와세다대 총장과 어윤대 고려대 총장은 ‘공동 프로젝트에 관한 양해각서’를 맺었습니다. 준비 기간을 거쳐 2009년부터 와세다대 아시아연구기구와 고려대 일본연구센터(현 GLOBAL 일본연구원)의 교류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저는 아사히신문 기자 시절의 경험을 살려 이 사업을 ‘성신학생교류’라 이름 붙였습니다. ‘성신’이란 에도(江戶) 시대 조선통신사를 접대한 유학자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내건 ‘서로 속이지 않고 다투지 않으며 진실에 기초해 교류한다’는 외교 철학입니다.

첫 2년은 야마나시(山梨)현 기요사토(淸里)에서 서머스쿨을 열었습니다. 2011년 3·11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재해가 일어나자 고려대 측으로부터의 요청도 있어 히로시마(廣島) 투어로 전환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핵과 인간’을 배우는 스터디 투어입니다. 제가 아사히신문 기자 시절인 1968년부터 한국인 피폭자 문제를 취재했던 체험을 살리기로 하고 교류 명칭도 ‘한일 성신학생통신사’로 바꿨습니다. 200년 전의 ‘신뢰를 주고받는 사절’을 부활시킨 겁니다.

2014년부터는 격년으로 히로시마 투어와 ‘한국의 히로시마’라 불리는 경남 합천 방문 투어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2009년 제1회 교류이래 참가자는 약 450명에 달합니다.

무엇보다 한일 성신학생통신사는 2014년부터 화정평화재단의 중점 사업으로 뽑혀 매년 큰 지원을 받으며 한일 화해와 공생을 위한 침반이 되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차세대를 짊어질 참가 학생들은 ‘성신’ 교린 정신을 발휘하면서 ‘개인과 개인’의 유대가 국가의 벽을 넘어 우호의 초석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있습니다.

2017년부터는 성신통신사의 선배들도 참가해 교류의 수준이 한단계 올라갔습니다. 고려대에서는 “성신학생통신사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됐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첫해 교류에 고려대에서 참가한 이미영 씨는 졸업 후 돗토리(鳥取)현 요나고(米子)시의 국제교류원이 돼 같은 시의 직원과 결혼하고 두 아이를 낳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한일의 가교’를 체현한 겁니다. 와세다대에서 2009~2011년에 3차례 참가한 이시이 도루(石井暢) 씨는 사회에서 살려낸 ‘성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합니다. “페루의 일본계 기업에 파견돼 일하면서 현지인들과 커뮤니케이션이 참 힘들었습니다. 그때 소중하게 생각한 것이 성신 교류에서 배운 정신이었습니다. ‘상대 입장에서 생각할 것’, ‘열정을 갖고 상대가 이해해줄 때까지 전달할 것’ 등이죠.”

이처럼 선생의 유지는 미래 세대의 ‘가교’가 돼 강력하게 계승되고있습니다. 화정 선생께 다시 한번 마음으로부터 깊은 감사를 올립니다. 합장.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