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임권택
임권택영화감독
평생 ‘영화쟁이’로 살아서인지 세상 돌아가는 이치나 인간관계에 대해 좀 어둡다. 아니 많이 둔한 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고생을 많이 했고 나 대신 세상사를 챙겨줬다.

지금은 건강 때문에 영화를 쉬고 있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생직장인 영화 현장에서 그대로 살았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별일 없으면 오전 6시 현장에 도착해 촬영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그날 현장에서 배우와 스태프에게 오늘 촬영할 내용을 설명하고, 슛에 들어가고, 또 중간중간 끼니를 챙기는 그런 60년 세월을 보냈다.

동아일보와 화정 김병관 회장은 그런 내가 영화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준 존재다. 내 딴에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그게 어떻게 혼자의 힘으로 이뤄지겠는가.

화정 선생, 알고는 있었지만 말도 섞고 제대로 보게 된 것은 1993년 영화 ‘서편제’가 계기였다. 사실 ‘서편제’ 흥행에는 동아일보의 역할도 컸다. 동아일보가 개봉 두 달쯤 됐을 때 사회면에다가 ‘아직도 서편제 안 보셨나요’라는 화제 기사를 크게 실었다. 영화 서편제 인기 덕분에 원작 소설과 음반도 덩달아 많이 팔려 문화계에 국악 바람이 불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가 서편제 관객이 40만 명 가까이 들었을 때였던 것 같다. 그 기사가 나간 후 관객이 더 늘어났고 이후 입소문이 꾸준히 나면서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서울 관객 100만 명을 넘어섰다. 화정 선생을 뵌 것은 서편제가 개봉된 지 얼마 안 된 즈음이었던 것 같다. 정확하게 어느 자리였는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문화계 여러 사람이 함께 있는 모임이었다. 그때 화정 선생이 “대단한 일 하셨다”고 했다. 그날 나눈 다른 얘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화정 선생이 서편제에 대해 재미있게 봤다, 좋은 영화다, 이런 언급을 한 게 아니라 “대단한 일”이라고 표현한 것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러면서 영화 중 김명곤이 딸을 데리고 나오면서 불렀던 사철가를 그 모임에서 소리를 하는 한 분에게 청하기도 했다.

그때 ‘이분의 국악에 대한 애정은 정말 가늠하기 힘들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대단한 일이라는 것도 우리 소리를 영화를 통해 잘 담아내고, 많은 관객들에게 보도록 해 국악을 알렸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그 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에 다니면서 조금 더 자주 뵙게 됐다. 한번은 몇 사람이 부부 동반으로 초청을 받아 저녁 식사를 함께하게 됐다. 저녁 먹으면서 반주도 하고 차를 나눴다. 술이 몇 순배 돌았는데 갑자기 “임 감독이 홍보 한번 맡아 달라”고 했다. 그런데 구체적인 설명이 없어서 다니던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을 말하는 것인지 좀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돌이켜보면 영화쟁이에게 홍보를 언급한 것은 영화가 갖고 있는 대중적인 전파력이나 힘, 이런 것을 고려했던 게 아닌가 싶다. 본인이 이끌어온 고려대나 동아일보 모두에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그때 궁금한 걸 제대로 한번 물어봐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지금까지도 궁금증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뒤 자연스럽게 사석에서 몇 번 더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때마다 받은 인상은 자기주장이나 소신을 드러내 부담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묵하지만 흥이 있었다. 어깨에 힘주고 하는 게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동아일보가 우리 사회를 위해 얼마나 큰 역할을 해 왔는가. 그런 동아일보의 사주인데도 화정 선생에게는 과시가 없었다.

화정 선생의 첫 모습은 과묵한 탓에 꽤 무뚝뚝했다. 그런데 그 첫인상을 넘어서면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편한 분이었다. 그분이 편하게 말해도 동아일보의 전통과 권위가 실리기 때문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람들 앞에서 더 조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함께 일을 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분이 일하는 방식이 어떤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시시콜콜한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본인은 넓게 보면서 아랫사람들을 믿고 맡기는 스타일 아닌가 싶었다.

인연의 실타래는 2001년 제6회 일민예술상 수상으로 이어졌다.일민예술상이라면 동아일보사 명예회장을 지낸 일민 김상만 선생의유지를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그래서 그 상의 권위와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서편제’를 비롯한 많은 영화에서 한국인의 정과 한을 영상으로 풀어내고 ‘춘향뎐’으로 한국 감독으로는 최초로 칸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다는 것이 수상 사유였다. 심사야 심사위원들이 했겠지만 그래도 선대에 이어 우리 것을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꽃 피우려고 노력했던 화정의 마음이 느껴졌다. 어떤 이유인지 몰라도 그때 화정 선생은 시상식에 참여하지 않아 뵙지는 못했다.

2002년 고려대 언론대학원에서 대학원 창설 10주년을 맞아 제정한 ‘언론·문화인상’의 제1회 수상자가 됐다. 당시 나와 오래 호흡을 맞췄던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와 정일성 촬영감독도 함께 받았다.그 직전에 나는 영화 ‘취화선’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 영화사적인 의미야 자세히 알려진 일이고, 개인적으로는 전에 받은 일민예술상에 대해 보답을 한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부족한 게 많은 사람에게 일민상이라고 하는 큰 상을 줬는데 칸 영화제 감독상으로 상 값을 좀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화정 선생이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이따금씩 전해졌다.워낙 품이 넓고 포용력이 큰 분인데 그런 소식이 들려 안타까웠다. 건강을 지켜 오래 사셨으면 주변이나 동아일보, 우리 사회의 발전에 더욱 도움이 됐을 것이다.

2008년 부음을 듣고 정일성 촬영감독, 배우 안성기 강수연 씨와 빈소를 찾았다. 생전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누군가 물어서 이런 말을 했다. “박정희 정권 때부터 어느 정권에서도 편하지 못한 시절을 보내면서도 꿋꿋이 한국 언론과 사회를 지탱하신 버팀목이셨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