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현락
이현락전 동아일보 주필
화정 김병관 회장은 우리나라 정통 언론의 맥을 지켜온 버팀목이었다. 불편부당한 자세로 정론을 펴는 언론, 온갖 압력에 맞서 진실을말하는 언론, 권력에 영합하지 않고 감시하는 언론, 이런 언론을 정통언론 이라고 한다면, 세대를 이어 이런 태도를 견지해온 동아일보 외에 우리나라에서 정통 언론이라고 할 곳이 또 어디인가? 김병관 회장은 신문의 사주, 발행인, 경영자로서 동아일보가 정론지, 권위지로서의 위상을 일관되게 지켜 오늘에 이를 수 있도록 기틀을 다진 분이다. 그는 중요한 시기에 한국의 정통 언론을 지켜냈고, 언론 경영자라면 모름지기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가를 보여준 실천적 모범이었다.

인물은 시각과 관점과 상황에 따라 여러 이미지로 세상에 비친다.그 이미지들을 걷어낸, 내면에 자리 잡은 김병관 회장의 본질은 어떤 모습일까? 수습기자로 입사하여 만 35년간 동아일보에서 일하면서, 특히 편집국장 주필 편집인으로 내가 지켜본 김병관 회장의 본질적의식은 언론을 향한 헌신이었다. 동아일보를 정론지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은 강박에 가까운 것으로 보였다. 선대에서 이어지는 정신을 살려 창간 주지(主旨)를 제대로 구현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일, 이것은 그의 책무이자 숙명이었고 이를 위해 어떤 압력에도 거침없이 대응하는 삶을 살았다. 언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안일(安逸)을 마다하고 외롭고 험난한 길을 걸었으며 권력과의 대립으로 끝내 탄압에 의한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언론인으로서 뿐 아니라 교육 경영자로서 교육 진흥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의는 헌신적이었다. 특히 21세기 정보화 디지털 시대를 맞아 2001년 우리나라 최초로 온라인 대학인 고려사이버대를 설립해새로운 고등교육의 장을 연 것은 특기할 일이다.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고려대 교육시설 현대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캠퍼스의 모습을 일신한 고려대 100주년 기념관과 최신 체육시설은 전적으로 그의 노력과 지원에 힘입어 건립됐다.

김병관 회장은 또한 선대 김상만 회장에 이어 문화 예술 스포츠후원자로서 이들 분야의 진흥에 큰 기여를 했다. 이들 분야에 대한 지원은 바로 문화주의의 사시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오늘의 한국 마라톤과 국악은 그를 말하지 않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언론관, 언론에 대한 태도는 분명하고 확고했다. 2001년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와 검찰 조사로 구속되는 상황에서도간부들에게 권력과 절대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을 만큼 부당한 탄압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당당했다. 그의 언론관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1996년 4월 19일자 동아일보 1면에는 ‘사시(社是)를 거듭 밝힌다’는 이례적인 사고(社告)가 실렸다. 요지는 이렇다. 먼저 ‘동아일보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계층 또는 특정 정파를 대변하는 신문이 아니며 창간사에서 밝힌 대로 한국 민족 전체를 대변하고 생각하는 신문’이 라고 선언한다. 이어 ‘민족 민주 문화주의는 1920년 4월 1일 창간 이래 변함없이 지켜오는 사시’라고 밝히고 ‘동아일보는 내외의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창간 주지와 사시에 따라 불편부당 시시비비비판적 중립의 자세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민족통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제작 방향을 밝히는 내용이다.

통상 신문의 사고는 새로운 지면 기획이나 사업을 알릴 때 싣는다. 이런 상례와는 달리 신문의 제작 방향을 새삼스레 밝히는 사고가나가자 언론계 일각에서는 의아하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사고는 당시 일부 정치 세력, 나아가 모든 잠재적 압력에 대한 경고 메시지로 던진 것이며 발행인이었던 김병관 회장의 언론관과 태도와 의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었다.

사고가 나간 배경은 이렇다. 그해 4월 11일 실시된 15대 국회의원선거 며칠 뒤 유력 정당 총수의 핵심 측근이 찾아와 편집 간부에게 동아일보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통고했다. 선거에서 동아일보가 자기들을 도와주지 않았다고 불만을 토로하면서 각 지구당 건물에 규탄 현수막을 내걸고 전국적인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당의 방침을 공식 전달하는 것이란 점도 분명히 했다.

자기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워 유력 공당(公黨)이 신문 불매운동을 벌이겠다니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김병관 회장의태도는 단호했다. 규탄이든 불매운동이든 마음대로 하라고 통보했다.그는 특히 전국을 대변하는 동아일보의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움직임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동아일보의 기본 방향을 다시 밝히고 어떤 압력에도 이를 지킨다는 태도를 천명하는 이례적인 사고를 이래서 내게 됐다. 그쪽에서는 사과를 해왔고 불매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는 밖으로 확고한 태도를 천명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내부적으로 자세를 다잡아 분위기를 일신하고 결의와 결속을 다지는 의미도 있었다. 스스로 결의를 확인하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언론의 본분을 말할 때 언론사의 경영자, 특히 사주의 역할은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언론이 언론다운 기능을 수행하는 책무는 편집진의 몫이며 그 직업적 윤리도 편집진이 지켜야 할 규범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언론 활동, 특히 그 독립성 유지와 권력 감시 기능은 경영자, 사주의 결연한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는 발휘될 수 없다. 사주가 흔들릴 때 미디어가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주의 존재와 태도가 중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앞서의 사고(社告)는 신문 경영자, 발행인으로서 김병관 회장의 언론관과 태도, 관점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온갖 신문이 부침하는 가운데동아일보가 줄곧 권력 감시 비판 기능을 선도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정론지, 권위지로 자리를 굳혀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주의 이런 확고한 자세가 결정적 버팀목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김병관 회장은 1980년대 중반부터 2001년 초까지 대표이사 또는 발행인 등으로 동아일보를 이끌며 신문의 양적 질적 토대를 획기적으로 확충했다. 서울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와 충정로 사옥을 비롯하여경기 안산 등 전국 여러 곳에 인쇄공장을 짓고 시설을 현대화했으며 발행 체제를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했다. 이 기간 중 인프라 확충 규모는 창간 이래 그때까지 누적해온 규모를 훨씬 능가할 정도였다. 오늘의 동아일보를 위한 기틀은 이 시기에 다져진 것이다.

신문의 질적 양적 토대를 확충하고 조간화를 단행하면서 그가 특히 심혈을 기울이고 고심하고 독려한 것은 환경 변화에 걸맞게 정론지로서의 위상과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직 전체의 혁신을 강조했고 구성원들의 보다 치열한 자세를 요구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0년대 초반부터는 미디어 기술의 변혁과 함께 사회 경제적 환경의 변화와 국민 의식의 다양화가 급속하게 진전되어이에 부응하는 노력이 절실했던 터였다. 인사와 조직 변경 등 여러 방면에서 노력이 있었으나 질적 성과는 그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발행인으로 대외적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쳐 동아일보의국제적인 입지를 한층 넓혔다. 한중 수교 직후인 1992년 9월 중국 최대 권위지인 런민일보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해 국내 언론사 최초로 이 회사와 제휴 협정을 맺었으며 1995년 2월에는 리펑(李鵬) 중국 총리를 방문해 단독 회견을 갖고 한중 우호 증진을 위한 의견을 나눴다. 이런 활동은 동아일보와 일본 아사히신문, 중국 런민일보가 참여하는 동북아 안정과 번영을 위한 연례 심포지엄으로 이어졌다. 일본 아사히신문과는 양사 편집국장 사장 교환 방문을 연례화하는 등 전통적인 제휴 협력 관계를 한층 확대했다.

1999년 4월에는 건국 50주년을 맞은 이스라엘을 방문해 이 나라 바이츠만 대통령과 대담을 갖고 양국 간 경제 군사 협력, 북한 미사일 개발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이스라엘은 중동 이슬람 국가들에 대한 북한의 미사일 및 핵무기 기술 전수 가능성을 크게 우려하고 있던 터였다. 북한의 미사일 및 핵무기 개발은 그 후 우려대로 진행됐다.

지면 제작에 관한 태도에서 그는 놀라울 만큼 스스로에게 엄격했다. 편집 불간섭의 전통을 지키고 존중했다. 편집국장 주필 편집인 등 간부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편집에 대해, 특히 사적 이해와 관련한 회장의 어떤 간섭도, 1단짜리 기사 한 건도 게재 요청을 받은 기억이 없다. 위에서의 행동은 밑에서 배우기 마련이다. 상층부에서 빚어지는 사소한 편법과 일탈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그 폭이 확대되기 십상이다. 이 점에서도 간섭을 자제하는 그의 태도는 매우 교훈적이었다.

인사에서도 원칙과 능력과 순수성을 강조했고 일절 개별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수습기자 모집이나 경력 기자 채용 때도 단 한마디 당부의 말씀조차 없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경영 쇄신을 위해 대대적인 조직 정비를 할 때도 정해진 원칙을 지키도록 당부할 뿐 간섭이 없었다. 이토록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에게 사내 특정 자리에 대한 정권의 인사 ‘희망’이 지인들을 통해 전해져 온 적이 두어 차례 있었다. 압력이나 다름없는 이런 작태를 그는 크게 개탄했다.

그는 신문을 누구보다도 열독했다. 주요 기사와 사설 칼럼을 거의 모두 읽는 모습이었다. 지면 뿐만 아니라 보고서도 자세히 읽었다. 경제부장을 끝낸 내가 1990년 미국 연수에서 돌아와 제출한 상당히 긴 연수 보고서를 꼼꼼히 읽고 코멘트를 적어 돌려 보내준 적이 있다. 회사 규정에 따라 기자들이 제출하는 연수 보고서를 바쁜 발행인이 모두 읽어본다고 생각하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는 듣는 형이기보다는 읽는 형이었다. 보고를 말로 들을 때보다 정리된 글로 읽었을 때 훨씬 더 주목하곤 했다. 논리와 체계를 중시하고 깊고 치밀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이다. 선대 일민 선생도 마음에 드는 글을 읽으면 필자를 불러 점심을 하면서 격려를 할 만큼 신문을 열심히 읽었다.

그는 권력과 언론은 긴장 관계에 있어야 하는 것으로 인식했다. 권력과 엄격히 거리를 두었고 어떤 세력과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권력과의 거리 두기는 그의 교유 범위에서도 잘 나타난다. 정치권 등 권력층 인사들과의 접촉은 드물었고, 있다 해도 중립적이었다. 권력과 거리를 두고 비판적 자세로 권력을 감시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언론의 본분이며 이것이 민주주의를 뒷받침한다는 인식은 사실 동아일보의 문화였다. 불편부당, 시시비비, 정론직필은 우리의 일상 언어였다. 이런 문화를 지키고 굳히는 일에 그는 앞장섰고 울타리 역할을 했다.

권력에 영합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도움을 받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1998년 외환위기 여파로 언론기관들도 심각한 경영난에 빠졌을 때 일부 신문에서 긴급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도록 청와대에 지원을 함께 요청하자는 제의를 해왔으나 동아일보는 이를 마다했다. 정권의 도움을 받으면 권력 감시 기능을 제대로 펼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동아일보가 민족지로서 남북 화해와 교류 증진에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실제로 동아일보가 제안한 방안이 남북 교류사업에 채택되기도 했다. 금강산 관광 지역에서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그 하나다. 그러나 대북 접근은 냉정해야 한다는 인식을 방북 경험을 통해 갖게 됐다.

1998년 10월 동아일보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평양에 도착한 날 환영 만찬 자리에서 북한 언론계 대표가 환영사를 하면서 느닷없이 한미 팀스피릿 군사 훈련을 비판하고 나섰다. 답사에 나선 회장은 즉각 반격했다. “북한은 왜 잠수정을 남쪽에 침투시켜 도발 행위를 하는가? 이런 행위 때문에 군사 훈련을 하는 것이다. 훈련을 비난하기 전에 도발을 멈추라.” 그 4개월 전 북한 소형 잠수정 한 척이 동해안에 침투했다가 돌아가던 중 속초 근해에서 어망에 걸려 무장 승조원 9명이 자폭한 사건을 언급한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 리 없는 북측 참석자들은 크게 놀라 당황했고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만찬 분위기를 생각해서 대응을 삼갈 경우 우리가 그들의 주장에 동조한 것으로 왜곡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강력하게 맞받아친 것이었다. “이런 행동을 묵인하면 줄곧 끌려다니게 된다. 단호하게 제동을 걸어 버릇을 고쳐야 한다”고 회장은 설명했다.

당시 북한은 금강산 관광 개시를 앞두고 동해안에 한창 항만 시설을 정비하고 있었다. 북측은 금강산 지역을 비롯해 원산 등 여러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북측의 무례한 행동은 가곡 ‘성불사의 밤’에 나오는 성불사 관광 길에 다시 나타났다. 절이 있는 황해도 정방산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이른바 6·25전쟁 피해 전시관이라는 곳으로 예고없이 안내되어 김병관 회장이 현장에서 대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누구 마음대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왔어? 의도가 뭐야? 남쪽에는 인민군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의 무덤이 적지 않아.” 꾸짖는 음성이 좀 떨어진 곳에서 입장을 기다리며 겹겹이 줄지어 서있는 단체 관람자들에게 들릴 정도여서 북측 간부들은 당황하여 허둥댔다. 회장은 방북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북측 간부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거듭 사과하여 사태가 수습됐다. 뒤에 알아보니 양민을 해쳤다는 미군은 그곳에 가지도 않았다고 한다.

송별 만찬 자리에서도 회장은 그들의 불성실한 태도 등 여러 문제를 강하게 비판했다. 방북 일정을 마친 우리를 배웅하려고 평양 순안공항에 나온 북측 고위 간부는 귀엣말로 속삭였다. “이 선생, 다음에는 회장님은 모시지 말고 오셨으면 합니다.” 회장의 거침없는 태도에 혼이 났던 것이다.

당시의 방북 경험을 통해 회장은 북한 측의 진실성을 불신하게 됐고 북과의 접촉에는 냉정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2000년 8월 국내 신문 방송사 사장 46명으로 구성된 언론사 사장단의 북한 방문에 동아일보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국을 망라한 언론사대표들이 단체로 북한 최고 권력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는 방북이어서 크게 눈길을 끌었다. 동아일보가 불참한 것은 그런 방북이 언론의 비판 기능을 제약하고 그들의 선전에 악용될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불참한 언론사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2개사였다. 동아일보는 남북 화해와 평화 통일을 지지하면서도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부가 추구해온 햇볕정책의 문제점을 비판해 왔다. 그후 남북 관계의 전개 양상은 김병관 회장의 당시 판단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말해 준다.

김병관 회장은 1970년대 독재 권력의 언론탄압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대규모 해직 사태에 따른 문제를 2000년대가 시작되기에 앞서 해결하기를 희망했다. 과거의 아픔을 씻고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열려는 생각이었다. 회사 간부로 하여금 해직 기자 모임인 ‘동아투위’ 측과 여러 차례 접촉하도록 했고 해결의 길이 보이는 듯했으나 조건에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성사되지 않았다. 상당한 사재를 내놓을 뜻을 밝혔던 화정은 화해가 무산된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돌이켜 보면 그는 참 독특한 분이었다. 투박하고 묵직한 인상, 어눌하고 과묵한 모습, 수사(修辭)에 어두운 언변, 강인한 성품, 급해 보이는 성격…. 이런 외양의 내면에는 깊은 사고가 있었고, 예리한 판단과 섬세하고 따뜻한 배려가 있었다. 통음도 불사하는 대주가였지만 취중에도 생각이 명료했고 기억이 정확했다. 대범한 성품이어서 작은 것에 연연하지 않고 일을 과감하게 밀어붙이고, 일을 위해서는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권위 의식과는 거리가 멀었고 서민적 풍모에 지극히 대중적이어서 호사스러운 면이 전혀 없었다. 신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 인상과 실질이 딴판이어서 묘한 매력을 지녔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일을 추진할 때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밀어붙이기도 했으나 주요사안에 대해서는 사전에 밖으로도 의견을 두루 듣고 치밀하게 검토해서 결정을 내린 사실을 뒤에 알게 되는 경우를 여러 번 겪었다. 일을 두고 노심초사, 끊임없이 고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기민하게대국(大局)을 짚어내고 대처하는 안목과 결단력은 나만이 지켜본 경험이 아닐 것이다.

그의 소통 노력은 대상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어느 누구와도, 어디서든 격의 없이 어울렸다. 간부들, 일선 기자들, 직원들을 가리지않고 만나 스스럼없이 의견을 나누고 듣고 설득했다. 업무 현장과 사무실, 집무실, 음식점 등 장소 불문에 술자리도 자주 마련했다. 권위를 완전히 털어버린 자세로 어울리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게 느껴지기도 해서 숙연한 기분이 들 때도 있었다.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세심하고 자상했다. 징계를 받은 부하 간부에게 사람을 보내 다독여 주는 경우를 보았다. 부하들을 다룰 때 개인들의 성격을 보아 강약을 조절해 가며 대하는 듯했다. 성격이 강한 부하에게는 밀어붙이듯이, 심약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했다. 술자리에서는 개인들의 주량을 헤아려 술잔을 권했다.

그의 일상생활은 호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공식 행사나 모임이 아니고는 고급 호텔이나 값비싼 음식점에 드나들지 않았고 대중적인 곳을 선호했다. 해외여행을 할 때도 요란하게 안내받는 것을 거추장스러워했다. 2000년대 중반, 퇴직한 선배 동료들과 회장을 모시고 호주뉴질랜드 캐나다를 각각 여행한 적이 있다. 우리는 매번 공항에서 렌터카를 빌려 직접 운전을 하며 여러 곳을 두루 구경 다녔고 예약 없이 모텔에서 묵었다. 현지 대중음식점에 들르고 슈퍼마켓에서 라면 등 식료품을 쇼핑해서 모텔 방에서 끓여 먹기도 했다. 그는 돈이 많이 드는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절약하는 것은 가풍인 듯하다.

그는 일부 세력으로부터 ‘족벌 언론’ ‘언론 재벌’ 운운하는 음해를 집중적으로 받기도 했지만 2001년 세무조사 결과 재산 내용이 드러나면서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벌 떼처럼 일어나 공격을 해대던 음해 세력과 거기에 대거 가담했던 언론들은 그 후 말이 없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래 배당을 해온 바가 없고 배당을 할 정도의 수익을 내온 것도 아니었으니 거만의 재산이 있을 리 없다. 이런 가운데서도 1997년 말 외환위기 여파로 회사가 큰 적자를 내고 상여금을 못 줄 형편이 되자 사원들 위로금으로 사재 20여억 원을 내놓기도 했다. 예금 적금을 모두 헐었다는 얘기를 뒤에 들었다.

그는 대주가로 주석을 마다하지 않았고 가끔 대 취하여 인사불성인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으나 주석에서의 모든 상황, 주요 대화를 어김없이 기억하고 있어서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집중과 긴장을 놓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처음 술자리를 함께하는 사람들중에는 겉모습만 보고 오판을 하거나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에게 술자리는 어울리고 관찰하고 읽어내는 자리인 듯했다. 정통 언론의 책임자로서 그 중압감과 고독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심적 위로를 음주에서 찾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동아일보는 곧 창간 100주년을 맞는다. 격변의 현대사를 거치면서 한 사회 조직이 한 세기를 이어온 것은 기적에 가깝다. 조직의 역량과 태도와 열의를 고양하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온 뛰어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촌과 일민에 이어 3대에 걸쳐 정통 언론의 정신을 이어온 김병관 회장의 삶이 그것이다. 지척의 안일을 마다하고 온갖 풍파에 맞서 정론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헌신하고 희생한 그의 삶은 치열하고 엄숙했다. 그 태도와 정신을 기억하고 새로이 조명하고 그 뜻을 높이 살려야 할 때다. 그 책무가 여간 무겁지 않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