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현인택
현인택전 통일부 장관·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들어오세요. 내가 책임질 테니 들어오세요.”2005년 5월 2일 오후 고려대 인촌기념관 재단 이사장실. 김병관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은 이건희 당시 삼성그룹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결기가 가득했다. 이날 고려대는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이 회장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할 예정이었다. 인촌기념관 대강당에는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김학준 동아일보 대표이사, 송필호 중앙일보 대표이사를 비롯한 재계 및 언론계 인사 등 축하객 60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학위 수여를 반대하는 학생 60여 명은 인촌기념관 밖에서시위를 벌였다. 이 회장은 고려대 100주년을 축하하며 기존 경영대자리에 지금의 100주년 기념관을 지어 기부했다.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것은 학교의 당연한 예의였다.

분위기가 험악하게 돌아가자 삼성 쪽에서는 안전 문제를 우려했다. 이 회장 일행은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이사장의 돌파력과 순간적인 결단력이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그의 전화를 받은 이 회장도 행사에 참석하기로 결단을 내렸다. 수행원에게 “양복 한 벌 더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수행원들과 고려대 교직원들이 시위대 사이를 뚫고 이 회장을 인촌기념관까지 모시던 순간의 분위기는 장엄하기까지 했다. 예정됐던 대강당은 아니었지만 이사장실에서 수여식이 무사히 진행되었다.

당시 기획예산처장으로 현장을 목격한 나는 김 이사장과 이 회장 모두 큰 어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들어오신 분도 웬만하면 포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부르신 분도 뒷감당을 못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분 모두 고려대 100주년 기념행사를 꼭 이뤄 내야 한다는 한 차원 높은 생각을 한 것이다.

1999년 3월부터 2005년 6월까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제11대이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고인은 고려대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그러면서 학계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 2005년 2월부터 기획예산처장을 맡았던 나는 짧은 동안이나마 교육자로서 김 이사장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교분을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인품과 인간적인 면모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해 김 이사장을 모시고 중국 칭다오(靑島)를 여행했던 기억은13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처장에 보임된 나의 과제 중 하나는 ‘고려대의료원을 어떻게 발전시킬까’였다. 당시 장동식 관리처장과 이 문제를 논의한 나는 ‘국내에서 당장 1등을 차지하지 못한다면 해외로 나가서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아이디어가 중국 칭다오에 고려대의료원 중국 분원을 내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의 의료 서비스 수준은 낙후돼 있었다. 수도 베이징과 달리 칭다오는 한국과 가깝기도 하고 한국인도 많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봐도 좋은 생각이었다. 중국이 필요로 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서비스하고 국내 유명 의료진이 1, 2년 순환 근무를 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아주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후 중국의 경제가 크게 발전했지만 사드 갈등 이전까지 많은 중국인이 한국의 병원을 찾아오지 않았는가.

사전 연구를 해서 김 이사장에게 보고를 드렸다. 같은 고민을 하고 있던 김 이사장은 선뜻 “그럼 같이 한번 가 보자”고 하셨다. 그래서 나와 장동식 처장, 임채청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함께 칭다오 여행길에 나섰다. 칭다오의 대학병원을 함께 돌아보고 합작사업을 실천한다면 중국 정부와 어떤 방식으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돈을 투자할 수 있을지 등을 현장에서 고민했다. 김 이사장은 당시 상당히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돌아와서 얼마 안된 6월 김 이사장이 세무조사와 관련한 대법원 확정 판결을 받아 이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사업은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아까운 일이다. 성사되었더라면 고려대의료원의 발전을 위한 엄청난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재단 이사장이 학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김이사장은 조부인 인촌 선생과 선대인인 일민 선생이 고려대를 세우고성장시킨 위대한 업적을 이어받은 터여서 항상 당신도 뭔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갖고 있었다. ‘내가 선친보다 훌륭한 것도 없이 고려대를 경영하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더 발전시켜야 나중에 하늘에 가서도 뵐 면목이 있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실제로 이사장 재임 시절 세워진 100주년 기념관이나 화정체육관 등은 학교 발전에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됐다. 본교 앞 중앙운동장을 광장으로 바꾸고 캠퍼스 전체를 세련된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것도 당시 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김 이사장은 나를 참 따뜻하게 대해 주셨다. 그를 굉장히 어려워한 분들이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나는 여러 가지 좋은 기억이 많다. 기획예산처장이 되고 얼마 뒤 저녁을 함께하자고 연락을 해 오셨다. 아마 새로 처장이 된 사람이 어떤지 궁금하셨던 것 같다. 저녁 자리에서 양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다 비웠다. 2차까지 가서 또 한잔하고 들어가시는 것을 확인하고 집에 왔다. 난 양주 두 잔이면 취하는데 그날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시간이 훌쩍 가버렸다. 아마도 그날로 테스트를 통과한 듯했다. 그 다음부턴 그렇게 많이 주량 테스트를 하지는 않으셨다.

이후 많은 자리를 모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학교 일로 자주 부르셨다. 그냥 저녁 약속이 없는 날에는 오후 4시 무렵 전화해서만찬을 청하곤 했다. 저녁과 술자리를 모시고 다니는 동안 늘 정신을 잃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이사장께서는 사뭇 말씀하기 어려웠을 것 같은 내용도 털어놓을 때가 많았다. 돌아가신 사모님을 자주 회상하셨고 어릴 적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은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다.

연배로 보면 굉장히 윗 분이었지만 나도 비교적 자유롭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드렸다. 대학교수이기 때문에 말을 가리고 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 친구는 내 앞과 뒤에서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셨던 것 같다. 내가 일민 선생을 기리는 일민국제관계연구원원장을 오랫동안 맡아온 것에 대한 신뢰도 있었던 것 같다.

지나고 보니 그 좋던 때가 당신 인생의 마지막 부근이었다. 어느 날 암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건강하셨다면 나에게도 큰 힘이 되어 주셨을 분이었다. 일민국제관계연구원에 돈이 더 필요하냐며 도와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직후였다. 정부에 들어가서 일할 때 가장 생각나는 분이었다. 살아 계셨더라면 정부 일 하는 데 뒤에서 음으로 양으로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주셨을 것이다. 지금도 그리움이 크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