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방상훈
방상훈조선일보 사장
김병관 회장님과 나는 신문 경영 면에서 비슷한 경력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두 신문의 발행인으로 재직했습니다. 김 회장님이 1987년, 나는 1989년에 발행인에 취임했고 그분이 그 직을 떠날 때까지 10년간 같은 직책에 있었습니다.

김 회장님과 나는 같이 언론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조부인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은 동아일보를 창간했고 그의 부친 김상만 선생도 그에 앞서 동아일보를 이끌었습니다. 나 역시 조선일보를 일으켜 세운 계초 방응모 선생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학업을 마치자마자 신문사에 입사해 밑에서부터 일을 배우고 익히며 성장한 것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론을 가업(家業)으로 배운 사람들이며 태생적으로 언론인이라는 뜻입니다.

김 회장님과 나는 정치권의 언론탄압에 맞서다가 같이 옥살이를 했습니다. 한날 한시에 국세청의 세무조사를 받았고 같은 날(2001년 8월 17일 오후 10시쯤) 구속됐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이 차이는 있지만 ‘감방 동기생’입니다. 그리고 같이 3년형을 받았고 비슷한 시기에 대법원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습니다.

내가 김 회장님과의 인연을 애써 강조하는 것은, 통상적이라면 서로 경쟁 관계로 시종할 수밖에 없었던 동종 업계의 경영자를, 보다 가까이서 보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경험을 갖게 됐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분을 잘 알기 전 김 회장님은 나에게 그렇고 그런 언론계의 선배이고 언론계에 적지 않은 일화를 남긴, 어찌 보면 언론계의 기인(奇人)이고, 동시에 경쟁 관계로만 남는 동업자로 인식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분을 신문협회 모임이나 회의장이 아닌 교도소의 담장 안에서, 그곳의 비좁은 마당에서 운동시간을 이용해 만나서 여러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나로서는 참으로 귀중한 소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을 여러 면에서 많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김 회장님은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과 독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햇볕정책을 지지해 달라는 김 대통령의 요청에 ‘동아일보는 햇볕정책에 찬성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했습니다. 김 대통령은 동아일보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동아일보가 흔쾌히 자신을 지지해줄 것으로 믿었겠지만 김 회장은 그런 인연에도 불구하고 독립된 언론으로서 동아일보 본연의 논지와 주장을 편 것입니다. 그분은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이 이끄는 신문 발행인단의 단체 방북행사에도 나와 함께 불응했습니다. 동아와 조선만불참한 것입니다.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그분의 입장은 조선일보와도 상통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김 대통령은 나를 청와대로 불러 자신의 방북에 따른 북한 김정일의 서울 답방을 조선일보가 환영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나는 조선일보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적 지원은 적극적으로 찬성하나 북한에 돈과 오일을 주는 문제는 신중히 해야 하며 김정일의 답방과 관련한 지면 제작은 신문사의 편집 책임자들이 결정할 문제라며 완곡히 거절했습니다. 이것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대한 강력한 세무조사의 시발로 이어진 것입니다.

김 회장님은 구속되기 한 달 전 부인을 잃었습니다. 혹독한 세무조사 과정을 부인은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이 중론이었습니다. 그는 부인의 빈소에 보낸 청와대 비서실장과 수석비서관의 조문 인사도 거절했으며 그때 ‘아내가 나 때문에 죽었다’며 애통해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상중에 구속까지 된 김 회장님의 심경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당국은 부인의 49재에김 회장의 구속을 풀고 잠시 참여하도록 배려해 달라는 나와 주변 사람들의 요청을 매정히 거절했습니다. 괘씸죄 때문이 아닌가 여겨지지만 김 회장님은 의연히 견디어 냈습니다.

그때 그분의 생각과 말씀을 일일이 옮길 수는 없지만 그분은 자신이 언론을 누대의 사명으로 삼는 집안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커다란 명예와 자부심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신문을 단순히 영리와 신분 상승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엄격히 경계하며 신문을 인생 그 자체의 업(業)으로 삼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마음이 역시 같은 신문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나를 진정한 ‘언론 동반자’로 보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동업자가 아닙니다. 동행자도 아닙니다. 우리는 동반자입니다”라고 말씀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는 동아와 조선이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다는 얘기도 나눴습니다. “사람들은 두 신문이 경쟁 관계에 있다고들 하지만 동아가 없으면 조선도 흔들리고 조선이 없으면 동아도 추울 것이다. 우리는 서로경쟁하지만 서로 등을 대고 있는 관계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김병관 회장님은 격의가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말은 투박하고 직설적이며 때로 상대방을 당혹하게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가식보다 좋았고 솔직해서 듣기 편했습니다. 2007년 식도암으로 성대 수술을 받고 육성을 잃은 채 투병하면서도 신문사 논설위원에게 술을 사주면서 이렇게 필담을 했다고 합니다. “뜨거운 국물은 식혀 먹고 독한 술은 물 타 마셔야 한다”고. 언중유골(言中有骨)입니다.

교도소에 같이 있을 때 나는 만날 때마다 “많이 걸으시라”며 건강에 각별히 유의하시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우리가 밝은 표정으로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언론탄압을 이겨내는 길이라고 얘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