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박관용
박관용전 국회의장
화정이 떠난 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2008년 2월 28일 화정의 영결식에서 우인(友人) 대표로 조사를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화정의 빈자리가 더 커 보인다.

나는 화정과 친목모임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다.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1993년 만들어진 구룡회(龜龍會)가 계기가 됐다. 시중에는 거창한 의미로 소문이 났으나 실제로는 ‘거북과 용처럼 오래 살자’는 뜻에서 그 이름을 붙인 것이다. 당초 고려대 언론대학원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됐지만 모임의 외연을 조금씩 넓혀 갔다. 언론계에선 화정과 윤세영 SBS 회장이 참여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나와 이정일 전 의원, SBS프로덕션 사장을 지낸 신영균전 의원, 재무부 장관을 지낸 이용만 전 자민련 상임고문도 포함됐다.경제계에선 김명하 김앤에이엘 회장,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등이화정과 함께했다.

구룡회 모임이 세간에 알려지자 대단한 ‘파워그룹’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다. 한 잡지사가 취재를 벌일 정도였다. 하지만 사실은 달랐다. 회원들끼리 우의를 돈독히 하는 자리가 더 많았다. 모이는 장소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간혹 화정의 자택에서도 모임을 가졌다.

구룡회를 함께하면서 나는 화정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자주 했다. 나는 중진 정치인이었고, 화정은 동아일보 사주였기 때문이다. 운동도 함께 하면서 개인적인 대화도 많이 나눴다. 화정은 나보다 네 살 정도 많았지만 서로 반(半)농담하고 지낼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나는 구룡회원들에게 화정을 빗대 “언론사 사장도 기자나 마찬가지이니 믿지 말고 말조심해라”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이나 학창 생활을 같이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이렇게 격의 없이 지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지내다 보니 화정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구룡회원들은 차츰 부부가 함께 참가하는 모임으로 커졌다.

나는 2002년 7월, 16대 국회 후반기 국회의장을 맡게 된 뒤에 구룡회원들에게 새로운 제안을 했다. 구룡회 회원들의 자식들도 서로 알고 지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아버지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면 자식들도 함께 알고 지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주니어’구룡회가 만들어졌다. 평소 알고 지내는 원로 대학교수를 초청해 주니어 회원들을 상대로 한 강의를 부탁했다.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주니어’ 구룡회 회원들은 불우한 이웃들을 위해 연탄 배달도 하면서 의미 있는 일을 해왔다. 화정은 사회 지도층의 도덕적 책무를 강조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해온 것이다.

화정은 겉으로 비치는 모습만으로 예단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이 깊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허물없이 얘기하는 경우 서로 농담을 많이 주고받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정은 내면으로 치밀한 성격이었다. 특히 자신의 가업(家業)이라고 생각한 동아일보, 고려대의 발전에 절실한 사안이라면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평소 화정은 나에게 “신문이 나오는 날이면 단 하루도 동아일보사설을 읽지 않은 날이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나와 함께 있는 동안에도 동아일보 사설을 꼼꼼히 읽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신문 제작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을 의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사의 역사적 격랑을 헤쳐 나온 동아일보가 대한민국의 ‘대표 신문’으로 우뚝 설수 있었던 배경엔 화정의 이 같은 ‘뚝심’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화정은 2001년 동아일보사를 퇴임하면서 “동아일보는 이 나라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라고 역설했다. 문민시대의 전주곡이었던 1987년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동아일보가 없었으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원칙을 지켜온 화정은 이런 동아일보 기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권력과언론의 긴장 관계는 언론사주 화정의 숙명이었다.

내가 김영삼 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다. 동아일보는 당시 조각(組閣) 인사 검증 보도를 주도하면서 김영삼 정부를 곤혹스럽게 했다. 나는 화정이 ‘봐줄 만도 하련만’이라는 원망을 했다. 그러나 화정은 학연이나 지연을 앞세운 여러 경로의 협조 요청을 차단했다. 동아일보는 시시비비(是是非非)의 필봉을 휘둘렀고 화정은 그 바람막이 역할을 한 것이다. 인촌과 일민에서 화정으로 이어진 동아일보를 명실상부한 대한민국의 대표 언론으로 키워 나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작용했을 것이다.

동아일보의 사세(社勢)를 확장하기 위해 화정이 기울인 각별한 노력은 대단했다. 지금 동아일보와 채널A가 입주해 있는 광화문 사옥은 대한민국의 중심인 광화문의 상징적 건물이다. 이 동아일보 광화문사옥도 화정이 있었기에 세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0년 전 화정의 영결식에서 “화정은 타고난 언론인이며 한반도를 뛰어넘어 동아시아를 무대로 삼은 언론인”이라고 회고했다. 평소 말을 아끼는 화정의 직관은 남북관계를 돌이켜볼 때 더욱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화정이 걸어온 길은 동아일보가 걸어왔고,걸어가야 할 길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화정은 동아방송이 1980년 전두환 정권의 폭력적인 언론통폐합으로 강탈된 사건을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있을 때 동아방송을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강했다. 내가 김영삼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화정은 동아방송이 다시 동아일보의 품으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절절히 담은 장문의 편지를 보내온 적이 있었다. 화정이 보낸 편지 곳곳에는 동아방송에 쏟아부은 각별한 애정이 묻어났다. 동아방송을 되찾는 문제는 이미 법정 소송으로 넘어가 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지만 화정의 그 열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정권에 의해 강탈당한 동아방송은 채널A 개국으로 부활한 셈이다. 화정의 간고한 노력은 개국 6년을 맞은 채널A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화정이 고려대 발전에 기울인 노력도 그냥 넘길 수 없다.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맡으면서 고려대 내 각종 시설을 확장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학교 설립 당시 세워진 본관 석조 건물 이외에 웬만한 학교 건물들은 거의 화정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해 왔다. “화정이 아니었다면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이렇게까지 키워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뚝뚝하고 말수가 적은 화정이었지만 화정은 부인인 안경희 여사에 대한 속정이 상당히 깊었다. 화정의 자택에 갔을 때 봤지만 화정이 안 여사에게도 상당히 예의를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 광풍이 불던 2001년 7월 안 여사의 변고를 접한 화정의 상심한 표정은 아직도 생생하다. 화정은 당시 빈소를 찾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언론사 세무조사가 시작된) 2월부터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어요. 연일 방송에 제 얼굴이 비치고 친구와 친지들이 국세청과 검찰에 소환 당하자 더 미안한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저 대신 죽은 겁니다”라고 말했다. 안 여사는 평생을 가정과 가문에 헌신해온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나는 당시 한나라당 언론자유수호비상대책특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언론 인터뷰에서“(언론사) 세무조사가 사람들한테 너무 지나친 압박을 주고 심지어 고통을 준 것이 아니냐. 어쩌면 언론사 세무사찰로 인한 간접적인 타살과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나옴 직하다”라고 비판했다. 화정은 그 시련과 슬픔의 기간을 굳건히 견뎌냈다.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화정은 2007년 성대 수술을 받고 육성을 잃은 채 투병 중이었다.화정이 병원에서 퇴원한 뒤 광화문 사옥에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위로차 지인들과 함께 방문한 적이 있었다. 말을 할 수 없는 힘들고 갑갑한 상황이었는데도 화정의 낙천적인 성격은 여전했다. 필담(筆談)을 주고받으면서 “잘 있었어?”라고 나의 안부를 먼저 물었다.자신보다 주변 사람들을 더 챙기는 세심한 잔정에 가슴이 먹먹했다.잠시나마 옛날 얘기를 화제 삼아 웃었던 기억이 새롭다.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더 적극적이고 굳건하게 버텨내는 화정의 대인(大人)다운 풍모였다. 화정의 그런 스타일을 잘 알기에 나는 화정이 이듬해 떠날 것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10년 전 화정을 보내는 영결식을 마치고 나오면서 ‘앞으로 화정이 없는 동아일보가 어떻게 될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화정이라는 거목(巨木)이 드리운 그늘이 크고 넓었기 때문이었다. 화정의 ‘음덕’을 입은 동아일보는 굳건히 ‘대표 언론’의 길을 걷고 있다. 화정이 더욱 그리워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