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갑수
김갑수동아일보 용인동백센터장
‘동아일보 판매개발요원.’
1991년부터 내 명함에 있던 이름이다. 보통 개발요원으로 불렸다. 신문 판촉 직원을 생각하면 된다. 개발 요원이라는 직함이 거창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 개발요원들은 이름에 걸맞게 남다른 사명감이 있었다.

나는 1998년 경기 용인에서 동아일보 독자 센터를 운영하기 전까지 8년 가까이 동아일보 개발요원으로 일했다. 전국을 누비며 동아일보 독자를 한 명씩 늘려갔다. 정식 직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동아일보 개발 요원 명함을 가질 순 없었다. 개발 요원이 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시험이 있다. 바로 한자 시험이다. 당시만 해도 신문기사에 한자가 많았다. 동아일보에 어떤 기사가 실리는지 알아야 구독을 권하지 않겠는가. 나는 100점 만점에 85점을 받아 당당히 동아일보 개발 요원이 됐다.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개발 잘한다’ 소리를 좀 들으면서 이른바 전략지역으로 향했다. 한 달 가까이 숙식하면서 신규 독자를 발굴했다.

개발요원들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본사에 모였다. 서울 충정로 사옥 1층 로비에서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다 보면 화정 회장님이 오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었다. 멀리서 회장님의 모습이 보이면 다들 슬금슬금 뒤로 빠졌다. 그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회장님이 다가와도 피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안녕하십니까?”

옆에 있던 동료들은 움찔하며 비켜섰지만 나는 오히려 큰 소리로 인사했다. 아직도 또렷하게 떠오르는 기억이다. 처음 인사 드렸을 때 회장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가셨다. 그렇게 두 번, 세 번 회사에 올 때마다 회장님과 마주쳤고 나는 그때마다 똑같이 큰 소리로 회장님께 인사했다.

“그래, 김갑수 수고했어! 이런 사람 없어. 힘내.”

어느 날 화정 회장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말씀하셨다. 개발요원들은 본사에서 모일 때 왼쪽 가슴에 이름표를 달았다. 나중에 들은 말이지만 내가 만날 때마다 피하지 않고 인사하니 자연스레 회장님이 내 이름을 눈여겨보셨다가 기억하셨다고 한다. 인사 하나로 눈도장을 제대로 찍은 것이다. 신이 났다. 어깨에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동아일보에 대한 자부심이 더 커졌다. 그만큼 더 열심히 독자를 만났다.

경쟁지 독자를 너무 많이 동아일보 독자로 바꾸니까 해당 경쟁지에서 나를 스카우트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제의를 거절했다. 사람이 오락가락하면 안 된다고 여겼다. 바로 회장님한테 받은 마음 때문이었다. 회장님이 배달학생부터 개발요원까지 하나하나 “다 우리 가족이다”라고 말씀하는 걸 여러 차례 봤다. 그 시절 당연하게 여겨졌던 언론사주로서의 권위 의식은 전혀 없었다. 그때 회장님의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잘나가던 개발 요원 그리고 지금 독자센터장 김갑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나와 화정 회장님의 인연은 그렇게 인사 드리고 격려 받은 게 전부다. 다른 분들과 비교하면 회장님과의 인연 이라고도 하기 어려울 만큼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 깊이는 다르지 않다고 자부한다. 독자 센터를 운영한 지 벌써 20년 남짓 됐다. 옛날과 다르다. 여러 가지 들고 어려운 일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나는 버틸 힘이 있다. 동아일보 개발 요원 시절의 경험이 나에게는 힘이다. “김갑수, 힘내!”라는 회장님의 쩌렁쩌렁한 한마디가 젊은 시절 나에게 심어준 사명감덕분에 지금도 자긍심을 갖고 독자 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나는 말재주도, 글재주도 없다. 변명하자면 그래서 회장님이 힘드시던 시절 멀리서 응원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 센터를 운영하면서부터는 회장님을 뵐 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건강하셔서 가끔 얼굴을 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아마 회장님은 하늘에서도 그때 나를 격려해 주시던 때처럼 자상한 얼굴을 하고 계실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