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오명
오명전 동아일보 회장
내가 화정을 처음 뵌 것은 1980년대 중반 체신부 차관으로 일할 때였다. 정부에 몸담은 공무원들은 언론사 사람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할 때 조심스럽다. 또 공무원 중에는 사람들 앞에서는 좋게 말하고 돌아서면 움직이지 않는 처신이 몸에 밴 사람들도 많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에게나 곧이곧대로 말하는 성격이었으며 화정과 대화를 할 때도 솔직하게 모든 현안에 대해 즉답을 했다.

또한 현안 이외에 이런저런 대화를 할 시간이 생길 때는 신문사 정보화의 중요성에 대해 얘기하면서 동아일보의 정보화를 돕겠다는 의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1986년 창간된 과학동아 준비 작업을 할 때도 화정은 나의 의견을 구했으며 나는 우리나라에도 과학잡지가 필요하다는 데 대해 적극 찬성하고 한국 과학의 발전을 위해 과학 전문 잡지를 반드시 만들어 주길 바라며 이때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화정은 여러 차례 협상과 대화를 이어가면서 나의 솔직한 태도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또한 정보화와 과학 분야와 관련해서는 기꺼이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 후 1987년 체신부 장관이 되고 1995년 말 건설교통부 장관을 물러날 때까지 화정과 특별히 지속적으로 만난 일은 없었다.

김영삼 정부에서 교통부 장관,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내고 물러나있던 1995년 말 김영삼 대통령이 불러 청와대에 갔더니 경기 과천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하라고 했다. 과천에는 공무원들이 많이 사는 데도 불구하고 여당에서 4번씩이나 여론조사를 돌려봐도 여당 후보의당선이 힘든 것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섯 번째 여론조사에서 여당 후보로 오 장관을 집어넣어 보니 당선된다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내가 과천 출마를 저울질할 즈음에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구속됐다. 나는 김 대통령을 찾아가 “내가 모시던 두 대통령이 감옥에 갔는데 정치적 책임이 내게도 있다. 한번 모신 상사는 평생 상사다”라며 총선 불출마 의지를 밝혔다. 김 대통령은 “오 장관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오 장관은 검증을 해보니 깨끗하더라”며 계속 출마를 권유했다. 나는 마지막으로 “지금 내가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에게 돌을 던지면 각하께서 좋아할지 몰라도, 각하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내가 또 돌을 던지지 말란 법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YS는 “알겠다”며 물러섰다.

그렇게 후보를 사퇴했는데 1996년 4월 치르는 제15대 총선에서신한국당의 정책위원장을 맡아 달라는 제의가 왔을 때 이것마저 뿌리칠 수는 없었다. 신한국당의 정강정책을 성안하고 정보화의 비전을제시하는 공약을 만들었다. 선거 결과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자민련을 누르고 신한국당이 과반(過半)을 차지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 무렵의 일이다. 갑자기 김병관 회장이 전화를 걸어와 “내일 점심을 먹자”고 했다. 당시에는 장관에서 물러난 지 얼마 안 돼 계속 점심 약속이 밀려 있었다. ‘내일’은 물론이거니와 그 주에도 점심 약속이 다 차 있었다.

오랜만에 화정이 나를 왜 만나자고 할까 하고 궁금했다. ‘아마 동아일보 정보화위원장을 맡아 달라고 할 모양’이라고 짐작했다. 도무지 점심시간을 낼 수 없어 “내일 사무실로 편하신 시간에 찾아가겠다”고 말했다.

화정은 나를 만나자마자 “동아일보에서 일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다. 권오기 사장이 정부에 들어가고 빈 사장 자리를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많이 당황스러웠다. 방송 같으면 기술이라도 알지만 신문에 대한 지식은 백지였다. 그리고 누가 보더라도 나는 그때까지 동아일보보다는 조선일보와 가까운 사람이었다. 나의 매형이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김경환 씨다.

예상치 못한 화정의 제의에 대답을 못 하고 그냥 앉아만 있었다.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어 나는 그냥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사무실을 나왔다.

그 뒤로 동아일보 측에서 연락과 권유가 있었고, 고심 끝에 사장제의를 수락했다. 1996년 6월 나는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나는 사장으로서 동아일보가 2000년대에 종합미디어그룹으로 발전하는 비전을 수립했다. 종이 신문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려운 시대가 이미 다가오고 있었다. 화정도 신문이 종이 뿐만 아니라 정보시대에맞는 다양한 형식으로 기사를 전달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나로 하여금 동아일보가 종합미디어그룹으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를 닦도록 한 게 아닌가 싶다.

화정도 기사를 새롭게 전달하는 뉴미디어 서비스 등에 투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 기존의 음성통화 위주가 아닌 데이터 서비스를 주요기능으로 하는 PCS 사업 참여도 그 같은 방향 속에서 결정된 것이다.

1996년 6월 확정 발표된 신규 이동통신 서비스인 PCS 사업자 선정에 있어 동아일보가 한국통신 컨소시엄에 참여한 것도 결과적으로 보면 언론사 중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당시 PCS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서는 장비업체 등 국내 대기업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정보통신부는 1996년 3월 PCS 사업자 선정 방식을 최종 발표하면서 한국통신 컨소시엄에 PCS 사업권을 주고 통신장비제조업체와 비통신장비제조업체가 주도하는 컨소시엄 중에서 하나씩 선정해 사업 허가를 내주기로 했던 것이다. 동아일보 입장에서는 경쟁이 치열하고 사업권 획득을 위해 이전투구까지 갈 수 있는 대기업 주도 컨소시엄에 참여하기보다는 이미 사업권이 확정된 한국통신컨소시엄에 참여하는 것이 언론사로서의 중립성을 지키는 데 바람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때 투자 경험과 투자에 따른 성과는 그 후 동아일보가 다양한 미디어 분야에 진출하고 서비스를 개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996년 말 지금 동아닷컴의 전신인 마이다스 동아를 설립하고 다양한 미디어 분야에 투자했다. 외환위기 등 예기치 못한 사태로 인해 데이콤 컨소시엄 참여를 통한 위성방송 사업권 획득 실패 등이 아쉬움으로 남으나 당시가 동아미디어그룹의 정보 인프라를 갖춘 시기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조간화 이후 동아일보는 신문 제작 시스템의 전산화(CTS) 개발이 과제였다. 당시는 동아일보 뿐 아니라 경쟁사들도 앞다투어 CTS 개발에 나서고 있었다. 나는 정부의 행정전산망을 만든 경험 등을 바탕으로 해 동아일보의 신정보시스템 구축에 나섰다.

조선일보와 공동 기획으로 정보화 특집을 두 신문에 10회에 걸쳐 나란히 게재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경쟁 신문과의 이런 공동 기획 및 공동 게재가 이뤄진 것은 한국 신문 사상 처음이었다.

화정은 시국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타고난 감각을 갖고 있었다.화정은 인맥이 넓고 정관계 인사들과 식사나 술자리를 자주 해 살아움직이는 정보에 밝았다.

나는 외환위기 직후에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과 롯데호텔에서 단둘이 식사를 한 적이 있다. DJ는 화정을 이렇게 평했다. “지내보셔서 아시겠지만 화정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입니다. 어눌해 보이지만판단이 기민한 분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아들(김현철) 문제로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갑자기 화정을 청와대로 초청했다. 화정은 YS가 시국과 관련해 의견을 말해 보라고 권유하자 “한잔해야 말할 수 있겠습니다”라며 술을 청했다. 화정은 와인 석 잔을 거푸 마시고 나서 김 대통령에게 ‘아들 현철이 문제부터 처리하라’고 직설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내가 동아일보 간부 인사를 할 때 회장에게 안을 보고하면 그는 가만히 듣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저녁에 식사를 하면서 “그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그가 이런 말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한 적이 있지요”라고 말했다. 비상한 기억력이었다. 그러면서도 사장의 입장을 배려했다. 내가 5년 가까이 사장을 한 뒤 후임 사장으로 김학준 씨가 선임되었을 때 화정은 회장 자리를 선뜻 내주었다.

화정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10년이 됐다. 화정을 다시 만난다면못하는 술이라도 한잔하면서 “요즘 세상이 어찌 돌아갈 것 같습니까”라고 묻고 싶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