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수성
이수성전 국무총리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김성수 연수 선생 형제와 선친(일제강점기복심원 판사를 지낸 이충영 변호사)은 인연이 깊었다. 서울 혜화동 집에 인촌 형제의 자제인 고 김상만 동아일보 회장과 김상협 전 국무총리가 자주 놀러오기도 했다. 도쿄제대를 졸업한 선친과 김 전 총리는대학 선후배여서 친분이 깊었다. 내가 서울고를 다니던 1955년 인촌선생이 돌아가셨다. 그때 납북된 선친을 대신해 교복 차림으로 문상을 갔던 기억도 얼마 전인 것처럼 생생하다.

내가 처음 화정을 만난 것은 김영삼 정부 때인 1995년 2월 국무총리가 된 직후였다. 청와대에서 처음 상면한 화정은 안경을 끼고 큼직한 체구였다. 청와대에 오면 누구나 다소 위축되기 마련인데 화정은 당당했다. 녹록지 않은 사람이라 여겨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 “저사람이 누구신가?”라고 물었다. “동아일보 회장”이라고 답했다. 나는 그쪽과 우리 집안 간 세교와 친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화정은 잘 모르는 듯했다.

화정이 나에게 “저녁이나 하자”고 연락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격의 없이 대해 주는 화정과 함께 술자리를 옮겨가며 3차까지 갈 정도로 대취했다. 보면 볼수록 화정은 겉으로는 덤덤한 듯하면서도 마음이 따듯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깊었다. 내가 서너 살 위인 화정에게 “형으로 부르겠다”고 했다. 총리로 있을 때 자주 만나 식사를 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다. 언론사 회장으로 여론을 기탄없이 전해 주는 화정과의 솔직한 대화는 국정 수행에도 도움이 됐다.

한번 만나면 뿌리 뽑듯 술을 마신다는 소문이 김영삼 대통령에게도 들어갔던지 “김 회장 술이 센 분인데 술을 너무 과하게 마시지 말라”고 당부한 일도 있다. 1997년 3월 총리 퇴임 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그해 여름 어느 날 화정과 나는 술을 많이 마셨다. 가볍게 술 한잔한다는 것이 흉금을 터놓고 얘기꽃을 피우다 보니 과했던 모양이었다. 귀갓길에 계단에서 굴렀다. 경사가 급한 한남동 집 계단에서 실수로 발을 헛디뎠다. 왼쪽 팔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러지는 복합골절을 당했다. 젊었을 때 유도를 배워 취한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낙법을 써 그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병원에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왼쪽 손 4군데에 뼈를 고정하는 쇠침을 박았다. 얼마 뒤 김윤규 전 현대아산 사장 아들 주례가 잡혀 있었던 기억이 났다. 김 전 사장에게 연락해 병원 입원 중이라 못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쪽에서 “청첩장을 다 돌려놓았으니 거동이 가능하시면 꼭 와 주십사 합니다”라고 신신당부했다. 할 수 없이 두루마기 한복 차림으로 왼손 깁스가 안 보이게 가리고 주례를 한 기억이 난다. 그때 수술한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샤워를 하다 왼손에 남아있는 4군데 자국을 보면 인정이 넘치던 화정 형과의 추억이 떠오른다. 그 시절 화정과 나는 동아일보 회장이나 전직 총리 사이가 아니라 형 동생처럼 정말 격의 없이 지냈다.

왼손이 부러져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였다.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책임질 일도 아닌데 동아일보 한 간부 편으로 봉투를 보냈다. 입원비에 보태 쓰라는 배려였다. 다시 한번 화정의 따듯하고 깊은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식사를 하거나 술을 마실 때도 늘 소탈하고 조금도 권위를 세우지 않았다. 어릴 때 고향 전북 고창에서 지낸 옛 추억을 얘기할 때의 천진한 표정과 미소가 지금도 생생하다. 중학생 때 그곳에서 연상의 여학생을 짝사랑한 얘기까지 스스럼없이 나에게 했던 기억도 난다.

화정이 김대중 정부 때 세무조사를 받고 영어의 몸이 됐을 때는 마음이 참 아팠다. 내가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부의장으로 있을 때였다. 화정을 위로하기 위해 서울구치소로 면회를 갔다. “건강은 이상이 없으신지” 물었다. 그때 화정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태연자약했다. 구치소에서도 평소의 태평함과 대범함을 잃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그때 함께 수감된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도 면회했다. 방 사장이 “(김병관 회장 면회에) 곁다리로 저도 면회 오신 거죠”라고 말한 기억도 난다.

화정이 풀려나온 뒤 우리는 다시 전과 같이 자주 만나 친분을 이어갔다. 시련을 겪고 난 뒤 인데도 늘 꾸밈이 없고 당당했다. 화정이 어느 날인가는 울산 김씨 문중 제사 때 잔을 올리는 초헌관을 맡아달라고 했다. 하서 김인후 선생이 집안의 얼마나 큰 어르신이신가. 많은 사람이 모인 엄숙한 자리에서 술잔을 올렸다. 화정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애를 쓴 인촌 선생의 유지를 실천하기 위해 늘 노심초사했다. 동아일보를 잘 만들기 위해서 정론직필을 위한 의견이나 아이디어를 묻기도 했다. 그 즈음 이런저런 난제로 인해 잠을 못 이룰 때도 있는 눈치였다. 때로는 방에서 나와 복도 마루에 이불을 깔고 자는 일도 있다는 말에 궁금하게 여기니 “조상 신명이 답을 주시도록…”이라고 했다. 동아일보를 위해 화정이 24시간 정신을 쏟았던 징표나 다름없다.

화정이 한시도 잊지 못하는 할아버지 인촌은 고려대를 설립하고 민족언론 동아일보를 세우고 일구었다.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언론과 교육 사업을 지속한다는 것은 시종 숱한 어려움과 마주하는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잣대로 인촌 같은 민족지도자를 친일파로 낙인찍는 것은 참으로 옳지 않다. 선친 역시 일제강점기 판사를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 명단에 올랐다. 선친도 한복을 입고 한국말로 재판하다 상급자의 지적도 받았지만 굴복하지 않았다. 창씨개명을 거부한 뒤 법복을 벗고 독립투사를 변호한 분이다. 그런데도 친일 명단 편찬 관계자가 먼저 전화를 걸어와 “판사 경력 때문에 어쩔 수 없으니 양해를 해 달라”고 했다.

동아일보는 1936년 8월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생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워 무기정간 당하고 당시 사장과 편집국장이 옷을 벗고 몇몇 일선 기자는 옥고까지 치렀다.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소신있게 용기 있는 목소리를 내다 탄압받은 것은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화정은 광화문에 새로운 사옥을 세우고 동아일보가 최고의 신문으로 거듭나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게 동아일보 구성원들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 있다. 자유당 독재에 꿋꿋이 맞서고 군사정부 때도 할 말은 소신 있게 했던 동아일보의 혼과 기백을 지키는 것이다. 화정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언론인이다. 김영삼 대통령이든 누구에게든 할 말은 반드시 하는 배포와 용기를 잃지 않았다. 권력이 억압하고 경영상의 불이익을 감수하더라도 그런 소신과 기백을 지킬 수 있게 해달라고 하늘과 선조에게 맹서한 사람이다.

대한민국이 무척 혼란스럽다. 해방 전후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나라의 좌우 진영 대립과 세대 간 갈등도 심각하다. 전통의 동아일보가 민족지로서의 위상과 면모를 더 높이 세워야 한다. 우리 후손들이 대대손손 살아가야 할 나라의 앞날을 밝게 만들 수 있도록 애국의 기풍을 더욱 진작해야 한다. 무엇보다 망국적인 남남분열을 극복하고 나라의 통합과 발전을 이루도록 정론직필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 손기정 선생의 가슴에서 일장기를 지운 자랑스러운 전통을 잊지 말고 민족지의 소명을 깊이 인식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그러기를 하늘에 계신 화정 형도 희구할 것이다.

이런 혼란기에 화정 형이 계셨더라면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픕니다. 화정 형! 형님이 하늘로 떠나신 지 10년 세월이 훌쩍 지났군요. 부디 하늘에서도 편안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