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손진책
손진책연출가
화정 회장님의 국악 사랑은 문화계에 널리 알려졌지만 실은 젊은 연극쟁이들도 자주 찾아주셨다. 1980년대 극단 ‘민예’ 대표를 맡고 있었는데 사무실이 서울 신촌 이화여대 앞에 있었다. 그런데 화정 회장님은 예고 없이 사무실에 찾아오시곤 했다. 점심 무렵 느닷없이 찾아와 “별일 없느냐?”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으셨다.

지금은 좀 나아졌다고 하지만 당시 연극쟁이들의 살림살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요즘은 연극무대에서 배우가 이름을 얻으면 영화나 TV 드라마라도 찍지만 그때는 그런 일이 거의 없었다. 작품을 무대에 올려 손님이 좀 많이 들면 그걸로 좋았고, 속된 말로 파리 날리면 같이 배를 곯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화정 회장님은 이따금 들러서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한턱 내시곤 했다.

전통의 동아일보를 이끌던 분이 허름한 극단 사무실까지 찾아와 연극쟁이들의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수다와 푸념을 넉넉하게 받아주셨으니 참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화정 회장님의 방문은 특별한 용건이나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연극쟁이의 삶 자체가 고달프고 힘든데 그런 우리 얘기에 귀 기울여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화정 회장님과 점점 인연을 쌓기 시작했는데, 좀 가까워졌다고 생각하셨는지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다. “창극을 하나 해야 한다. 그것도 새로운 창극, 신창극(新唱劇)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처음에는 국악을 워낙 좋아하시는 분이니 당연한 얘기려니 하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만남이 잦아질수록 창극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러다 정말 창극 ‘아리랑’을 연출하게 됐다.

거의 30년 전 일이지만,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1990년 8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공연에 이어 9월 당시 소련 지역에서 순회공연을 했다. 10여 일 동안 모스크바, 타슈켄트, 알마티 등 9개 지역을 돌며 공연하는 일정이었다.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으로, 19세기 말부터 연해주로 이주했던 우리 선인들의 고난과 애환, 후손들의 삶을 통해 한민족의 생명력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유현종 선생 작품에 내가 연출을 맡고 조상현, 김일구, 신영희, 박양덕 명창이 출연했다.

러시아 등 옛 소련 지역에서 창극을 공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공연 때 화정 회장님이 동행했다. 회장님은 동행하는 동안 “창극으로 소련에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 얘기를 한다니 너무 감격스럽다.고려인들이 겪었을 고통에 가슴이 아파 잠을 못 자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러시아 공연 길에서 새삼 느낀 것은 화정 회장님은 끼와 흥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무대에서 뿜어내는 배우의 흥이 다시 객석의 관객과 만나 어우러지는 것 자체를 즐겼다. 한번은 타슈켄트 공연장 로비에서 고려인처럼 코밑에 팔자수염을 붙인 화정 회장님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알은체를 했더니 회장님은 시치미를 떼면서 우리말을 못하는 고려인 행세를 하셨다. 은근하면서도 천진난만한 그 장난기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창극에 관한 화정 회장님의 꿈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러시아 공연에 이어 안중근 의사 스토리를 담은 작품으로 중국 동북 3성에서공연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소수 민족의 분리와 이탈움직임을 두려워해 공연을 허가하지 않았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동북 3성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베이징에서는 공연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그런데 그 소식을 들은 화정 회장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다. “안중근 의사는 우리와 중국 모두 공통적으로 존경하는 대표적 인물 아닌가. 그런데 정작 우리 민족이 있는 동북 3성에서 작품을 못 올리는데 뭐 하러 공연을 한단 말인가?” 아쉬움을 넘어 거의 역정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1994년에는 ‘천명’을 동아일보 주최로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올렸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혁명을 장대한 스케일로다룬 작품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흥행 면에서는 적자가 났다. 좀 시간이 지나서 화정 회장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말이야. 이득을 남길 필요는 없고, 크게 밑지지만 않으면 좋은데. 다른 사람들 눈도 있고, 이거 참….” 명분상 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괜찮았지만, 회사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손해를 보니 아래 직원들 보기가 민망하셨던 모양이다.

뭔가를 좀 즐기고 좋아하는 이들을 ‘마니아’ ‘애호가’라고 부른다.하지만 화정 회장님의 그것은 단지 애호라는 단어에 가두기는 부족하다. 특히 국악에 관한 사랑은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한 사명감에 더 가까웠다. 사라져 가는 우리 것을 누군가는 지켜야 하는데, 그 일을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처지에 화정은 ‘동아일보니까 당연히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동아일보 아니면 이 어려운 것, 감당하기 힘들고 손해가 눈에 보이는 것을 누가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평소 우리와 만날 때 회사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 대한 회장님의 한없는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공연쟁이라서 잘 모르지만 언젠가 “신문 제목에 따옴표를 너무 많이 쓴다”며 못마땅해 하시던 일도 기억이 난다. 신군부에 의해 빼앗긴 동아방송을 언급할 때면 자부심과 함께 깊은 울분 같은 걸 표하기도 했다. “동아방송이 우리 사회와 국가를 위해 한 일이 많아. 우리 방송이 제일 좋았어. 언젠가 방송을 되찾고 그 전통을 살려야지.”

‘인간 김병관’은 어떤 인물일까.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언론의 최고경영자였는데, 친구가 없어 나 같은 사람과 어울리셨을 리는 없다. 그분 마음속에 우리 문화에 대한 사랑이 가득했기 때문에 인연이 된 것 같다. 나도 무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누군가를 만나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라는 느낌이 온다. 그런데 화정 회장님은 예측이 쉽지 않은 분이었다. 그분은 무뚝뚝한 겉보기와 달리 속이 깊고 자상하셨다.

특이했던 점은 국악과 창극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깊은 애정을 가졌으면서도 간섭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이 바닥에서 큰 공연을 치르다 보니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았다. 애정이 지나치게 많으면, 어느 순간 그게 간섭이 되고 결국 공연에 도움보다는 독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화정은 ‘농’은 해도 간섭하지 않았다. 무대에 작품이 올라가면 그걸로 좋아하고 만족해했다. 시시콜콜하게 말씀하시는 스타일이 아니라 한번 믿으면 끝까지 기다리며 지켜봤다.

화정이라는 수수께끼에 대한 나의 열쇠, 또는 해답은 이렇다.

“지금 기준에서 봐도 스펙터클한 창극 공연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도였다. 특히 소련까지 순회공연을 간 것은 상당히 앞서간 시도였다.쉽지 않다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화정 회장님이 이런 도전에 나선 것은 당신 대(代)에 자신이 아니면 앞으로 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창극 공연은 그분 아니면 불가능한 시도였다. 우리 문화예술계는 음으로 양으로 큰 빚을 졌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그 빚을 마음의 부담으로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는 게 바로 화정 회장님의 매력이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