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한수산
한수산소설가
동아일보사의 일민미술관에서 ‘400년 만의 귀향-일본 속에 꽃피운 심수관가(沈壽官家) 도예전’이 열린 것은 1998년 7월이었다.

이 심수관 전을 앞두고 내가 일본 가고시마(鹿兒島)로 14대 심수관선생을 찾아가 연재 기사를 쓰게 된 것은 당시 정구종 편집국장의 아이디어였다. 며칠 뒤 김병관 회장님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우연히 만나 인사를 드리며 그 취재를 가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다. 동아마라톤의 참관기를 쓰며 회장님과는 낯선 사이가 아니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내 어깨를 두드리며 회장님이 말씀하셨다.

“한수산이가 쓰면 잘 쓰겠지!”

1994년 3월 경주에서 열린 동아국제마라톤대회에서 김완기는 2시간 8분 34초로 한국 최고기록을 일궈냈다. 그때 텅 빈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참관기를 쓰며 나는 기쁨을 함께했었다.

그 대회 전야제 회식 자리에서 허물없이 호기 어린 목소리로 “야, 한수산” 하며 나를 불러주셨던 회장님이었다. 그때를 회장님도 기억하고 계셨던 것일까.

400년 전. 정유재란을 맞아 일본으로 끌려온 도공들이, 도자기에 필요한 흙조차 없는 가고시마에서 사쓰마야키(薩摩燒)를 꽃피워낸 과정을 취재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벽과 마주선 느낌이었다.

약속한 4박 5일의 취재가 끝났을 때 나는 동행했던 사진기자를 돌려보내고 가고시마에 더 남기로 했다. 그때까지의 미진함으로 해서 ‘도대체 내가 무얼 쓰겠다는 것인가’ 자신에게 묻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의 취재는 자비로 충당한다. 그런 심정으로 혼자 남아 사쓰마야키에 대한 근원적인 취재에 들어갔다. 가고시마 시내의 박물관 미술관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조선 도공들을 이해하는 단초의 하나가 심수관가에 보관되어 있는 히바카리(火ばかり)라 불리는 다완이다. ‘불만 일본 것’이라는 뜻으로, 이 도자기는 흙도 유약도 조선 것이고 빚은 사람도 조선 도공이며 그것을 구워낸 불만이 일본 것으로 선조인 초대 심당길의 작품이다.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사쓰마야키가 되었는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첫 조우는 가고시마 역사자료관 ‘여명관’에서 만난 제작자를 알 수 없는 다완이었다. 히바카리의 원류를 깨닫게 하는 결정적인 만남이었다. 그 다완은 전시실 한구석에, 안개 가득한 강가의 수양버들이 봄비에 젖은 듯 나부끼는 흐릿한 문양을 가지고 숨듯이 자리하고 있었다.수양버들의 선 하나만으로도 그것은 한눈에 조선의 선이었고 색깔이었다. ‘아, 이것이로구나! 이것이 초대들의 작품이구나!’ 한순간 느낌이 왔다.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며 서 있자니 눈물이 차올랐다. 미술작품 그것도 도자기를 보고 울다니. 그토록 그 작품은 감동적이었다.

학예실로 가서 몇 년 전에 나온 이 작품이 실린 도록을 구할 수 없냐고 물었더니, 직원은 서고까지 나를 데리고 가서 그 책을 찾아주는것이 아닌가. ‘그냥 드리겠습니다’라는 말에 웃음까지 섞어서.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해 준 것이, 심수관가 도예의 개화와 절정으로 평가받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출품되었던 대화병이었다.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에서 일본 왕실의 결혼 선물로 바쳤던 이 대화병이 유럽까지 흘러가는 유전을 거듭하는 것을 일본에서 다시 사들여온 것이었다.

전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14대 심수관 선생도 ‘외부에 대여 중’이라고만 했을 뿐 소재를 알려주지 않았던 이 작품을 시립미술관 상설전시장에서 만날 줄이야. 내 키를 훨씬 넘는 키에 우람한 몸통이 꽃으로 휩싸인 그 화병 앞에 섰을 때 나는 몸이 떨려오는 무서움과 함께 그 작품이 뿜어내는 어떤 귀기 같은 것에 온몸이 휩싸였다.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가문의 대작 명품을 보았다는 기쁨으로 나는 미술관을 나오자마자 심수관 도요의 사무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 작품을 보았습니다. 첫 느낌이, 아름답다가 아니었습니다. 무섭다! 그런 거였어요.”

그날 밤 나를 집으로 초대한 사무장은 술잔을 기울이면서 말했다.

“전에 그 작품을 찍던 카메라맨도 같은 말을 했답니다. 보면 볼수록, 카메라를 대면 댈수록 작품이 무섭다고.”

심수관 선생이 살고 있는 미야마(美山)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폐허의 도예지를 찾았을 때는, 안내를 한 사무장은 그 산비탈에 큰 모기가 너무 많다면서 자신은 남고 나만 홀로 산을 오르게 했다. 일본육군의 창설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일으킨 세이난(西南)전쟁에 참여했다 전사한 도공들의 비석이 있는 묘지까지 찾아갔다.후환을 두려워한 후손들이 비석의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깎아낸 모습도 거기서 보았다. 혼자 남았던 취재의 날들, 그것은 사쓰마야키의 처음과 끝을, 그 시작과 절정을 만나는 시간들이었다. 활화산 사쿠라지마(桜島)가 뿜어내는 화산재가 날리면 하늘이 뿌옇게 변하면서 어느새 입 속에서 재가 지근지근 씹히는 가고시마의 거리를 그렇게 헤매고 뛰어다녔다.

이 전시회에 대해 김병관 회장께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던가는, 가고시마에서 취재를 하는 동안 하루에도 몇 번씩 서울에서 전화가 오던 것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때마다 전화 내용을 가지고 심 선생은 나와 상의를 하곤 하셨다. 김 회장과 심수관 선생의 이런 정성이 나에게도 힘이 되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수관 일가가 400년을 이어온 도공의 정신을 기려 ‘도혼(陶魂)’이라는 조어를 만든 나는 ‘도혼 400년-심수관을 찾아서’라는 연재를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첫 회를 1면에 싣는 파격적인 시도를 해 주었다. 5회 정도를 쓰기로 한 것이 13회를 넘어가는 화제를 불러왔고, 전시회에 관심을 쏠리게 하는 계기를 만든 것도 김병관 회장과 정구종 편집국장의 파격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연재가 시작되고 서둘러 3회분을 모아 심수관 선생에게 보냈다.읽어 보시고 무언가 말씀하실 게 있으면 알려달라면서. 며칠 후 15대심수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고맙습니다.”

대통령이 개막 테이프를 끊는 파격적인 전시회가 있기 전날, 환영만찬장에서 김수한 국회부의장이 내 자리까지 찾아와 그 연재를 스크랩해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해서 기뻤던 것도 추억의 하나다.

지금도 내 서재 한편에는 14대 심수관의 글 하나가 걸려 있다. 취재 마지막 날, 감나무 잎을 때리고 가는 빗소리를 들으며 가마 앞 공방에서 심 선생에게서 받은 글이다. ‘목숨을 다해 꽃 피우려는 그것 하나뿐, 억새도 나팔꽃도’라고 쓰고, 낙관을 찍어 주시던 그때의 모습이 어제 같다. 이것 또한 바라볼 때마다 김병관 회장과 함께 떠오르는 아름다운 추억의 하나다.

동아일보 사옥 옆으로 입장을 기다리는 관람객의 긴 줄이 늘어서는 성황 속에 5주간 5만여 명이 관람했던 전시회가 이어지고 있던 날이었다. 내일 출국하신다는 심수관 선생을 뵙고 인사를 드리러 전시장을 찾아갔다. 관람 시간이 끝난 빈 전시장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김병관 회장이 혼자 불쑥 들어서는 게 아닌가. 두 어른을 모시고 어쩔 수 없이 내가 통역을 하게 되었다.

서로 감사의 말을 전할 때까지 두 분은 화기애애했다. 다만 회장님께서 심 선생에게 물어달라는 말을 부탁했을 때까지는 그랬다. 김병관 회장님이 말했다.

“일본으로 돌아가시더라도 우리가 전시회를 잘 마무리하겠지만,뭐 특별히 부탁할 게 있는지 물어봐 주겠나?”

그 말을 그대로 전했을 때 심수관 선생의 부탁은 간곡했다.

“무엇보다도 희귀성이 앞서는 선대의 작품이라 돈의 가치를 떠나 귀중하니까, 무엇보다 안전에 힘써 달라고 꼭 좀 말해 주게나.”

‘무엇보다’를 연발하는 심 선생의 그 말을 그대로 전하자 김 회장께서 호기 있게 말을 받았다. “아 그건 걱정 마시라고 하세요. 우리가 무엇보다 철저하게 챙길 테니까 염려 마시라고!”

심 선생은 “400년 만에 고향을 찾아온 선대의 귀한 작품이니, 소중하게 마음 써서 보살펴 달라”며 다시 한번 부탁했다.

내리는 비가 감나무 잎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심수관 선생과 어두운 공방 옆 전시실에 앉아 있을 때였다. 심 선생이 말씀하셨다. “도공은 풀과 같다. 씨앗이 떨어진 그곳에서 잎을 피우고 줄기를 키우며 살아남아야 한다. 그 시대 그 환경을 겪어내야 하는 운명 그것이 도공의 운명이다.”

심수관 선생을 뵐 수 있었고 사쓰마야키의 발아에서 개화까지 그 흐름을 알게 해 준 동아일보, 내 개인사의 한 페이지에는 그렇게 김병관 회장에 대한 고마움이 고여 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