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달수
김달수울산 김씨대종회장
화정을 가까이서 뵌 것은 2002년 10월 울산 김씨 선산(先山)과 인촌선생 생가 터가 있는 전남 장성과 전북 고창을 화정과 함께 찾았을 때다. 화정의 선대인인 일민께서 이루신 업적을 되돌아보기 위해 김상준 삼양염업 명예회장(2004년 작고)을 비롯한 문중 원로들을 모시고 화정과 함께 3일 동안 동행하며 답사했다.

일민은 울산 김씨 대종회 2대 회장(1984~1994년)을 맡으셨다. 그 기간 중에 일민은 울산 김씨 번성의 터를 닦은 민씨 할머니(1351~1421)의 행장비를 세우고 재실을 보수하는 등 묘역 정화 사업을 주도했다. 민씨 할머니는 울산 김씨의 중시조인 흥려군 김온선생(1348~1413)의 부인으로, 탁월한 학식과 숙덕(淑德)을 갖춘 분이다.

민씨 할머니는 장성과 고창의 경계인 방장산 줄기 대명당에 산소를 손수 잡고 ‘말을 탄 자손이 밀등(방장산 앞 언덕)에 가득하리라’는 예언을 남겼다. 이 말씀대로 오늘날 전국의 일가들이 산소 마당에 가득하게 참제를 하고 있고 가문 또한 번성해 명성을 누리고 있다. 일민은 흥려군의 19대손이고 화정은 20대손이다.

일민이 문중 일에 발 벗고 나섰던 것을 화정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선대인께서 하신 일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2002년 이른바 ‘선산 투어’를 한 것이다.

화정은 장성군 북이면 달성리 명정마을 재실의 기와가 무너져 내린 것을 보고 수리비로 1000만 원을 내놓았다. 당시로서는 작은 돈이 아니었는데 선뜻 사비를 희사하는 것을 보고 ‘선대인처럼 문중 일에 관심이 많은 분이구나’라고 느꼈다.

화정이 동아일보 회장으로 재직할 때 울산 김씨 문중의 최대 숙원이었던 필암서원 성역화 사업에 음으로 양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필암서원은 호남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문묘에 배향된, 우리나라 18현(賢) 가운데 한 분인 문정공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을 주벽(主壁)으로 모신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고종 때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은 사적 제242호의 국가문화재로,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에 있다. 퇴계 이황과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불리는 하서 선생은 흥려군의 5대손이다.

필암서원 성역화 사업은 일민께서 처음으로 기치를 올리고 전국유림 1600여 명이 대통령에게 건의해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됐다.2000년부터 2009년까지 160억4700만 원을 들여 서원 주변을 정비하고 유물전시관과 숭의관, 진덕원 등 청소년 교육장을 건립하고 원림을 조성하는 등 10년간의 대역사를 마무리했다. 화정은 필암서원성역화 사업에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사업이 진척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주셨다.

나는 2002년부터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집안이나 문중의 큰 행사 때 화정과 가끔 통화를 했다. 화정은 행사에 자주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문중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94년 대종회 사무실이 서울 연희동에서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3층으로 이전했다. 화정은 가끔 대종회 사무실에 들러 “제가 할 일이 없느냐.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 말씀이 큰 위안이 됐다. 2004년 대종회 회관 건립 모금운동 때 화정은 사비 500만 원을 기탁했다. 인촌기념회에서도1000만 원을 내놓았는데 화정이 인촌기념회에 도움을 청한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다.

동아일보와 삼양사는 수십 년째 장성과 고창, 부안 등지의 묘소와 인촌 생가를 참배하는 행사를 하고 있는데 화정은 가끔 일가들을 만나 이런저런 도움을 준 것으로 안다. 그렇게 가슴이 따뜻한 분이셨다.

화정은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동아일보가 역대 정권과 타협을 했으면 어려운 일들이 없었을 것이다. 원칙을 가지고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인촌의 철학과 가르침을 화정이 이어받았기 때문에 동아일보가 여러 어려움을 겪지 않았나 싶다. 화정은 힘들더라도 늘 정도를 걸었다. 동아일보가 1등의 명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동아일보 출신들도 사명감이대단한 것 같다.

화정은 고려대를 자신의 분신처럼 여겼다. 학교도 1등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앞서가는 대학으로 키우려는 사명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걸 보여주기 위해 일가들을 고려대로 자주 초청했다. 정부가 거의 무상으로 사용해 오던 서울 삼청동의 고려중앙학원 토지 문제를 해결한 것도 화정이라고 들었다.

2008년 화정이 세상을 떴을 때 나는 호상(護喪)을 맡았다. 사회지도자가 갑자기 사라진 데 대한 아쉬움이 컸고 문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들 마음 아파했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께서 빈소를 찾아 45분간 조문을 하고 가셨다. 현직 대통령이 개인 상가를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 대통령은 매우 애통해하면서 상주를 위로했다.

화정이 떠난 지 10년이 되었다. 이상이 높고 꿈도 컸던 화정이 너무 일찍 떠난 것 같아 못내 아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