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신영균
신영균신영균예술문화재단 명예회장
화정은 투박하고 소박한 질그릇을 닮은 이였다. 사람은 첫인상이란게 있는데, 그는 무뚝뚝하고 잔정이 별로 없어 보였지만 시간이 가면서 유머도 있고 정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투박하지만 믿을 수 있고 포용력이 뛰어났다. 알게 모르게 남을 잘 배려했다.

화정은 나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나이도 있고 사회적 위치도 있어 회장이라는 직함을 서로 입에 올렸지만 화정은 자리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내 옆구리를 툭 치며 “형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이 탓 하지말고 연기도 하고 영화 제작도 하라”고 권하기도 했다. 내 맘속에도 더 늦기 전에 영화 한 편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있던 터라 그 말이 정말로 가슴에 다가왔다. 그래서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를 구하려고 애썼는데 아직 못 찾았다. 내 삶과 인연이 많은 제주 바닷가를 배경으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와 같은 영화를 남기고 싶다. 그럴 수만 있다면 먼저 간 화정의 조언에 보답이 될 수 있는데, 이제 가능할지 모르겠다.

화정은 원래 문화예술계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특히 국악인과 영화인들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울대 치대를 나온 내가 영화배우를 했고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예총) 회장을 하면서 영화인 복지를 위해 힘쓴 것도 서로 호감을 갖게 된 계기가 아닐까 싶다.

1993년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에 다니면서 화정을 좀 더 알게 됐다. 나와 같이 다녔던 1기 멤버에는 유명한 분이 많았다. 윤세영 전 SBS 회장, 임권택 감독, 강수연 배우, 정일성 촬영감독이 모두 동기생이었다.

이 무렵 임 감독의 영화 ‘서편제’가 단성사에서 개봉됐다. 그런데1주일이 지나도 관객이 많지 않아 곧 영화를 내려야 할 지경이 됐다. 그 때 정일성 촬영감독이 내게 “야단났다”고 하소연했다. 그래서 내가 화정을 모시고 고려대에서 상영을 하자고 제안했다. 화정이 국악을 너무나 사랑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려대 인촌기념관에서 ‘서편제’를 상영했다. 화정은 우리 소리를 주제로 다룬 영화에 큰 감동을 받았다. 원형을 살린 판소리 공연이나 창극 공연에도 힘을 기울였지만 영화라는 새 장르를 통해 국악이 대중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본 것 같았다. 또한 영화 ‘서편제’가 성공하는 과정에서 동아일보의 보도 역시 큰 힘이 된 걸로 알고 있다.

화정은 사람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소탈한 스타일이라서 이런저런 에피소드도 많다. 화정은 영화인들과도 가깝게 지내 가끔 어울렸는데 한번은 화정과 술이 세기로 유명한 영화배우 강수연의 술 시합이 벌어졌다. 화정의 도전이었다. 그런데 결국 화정은 업혀 나갔고, 강수연은 끄떡없었다.

고려대 최고위과정을 함께하며 만난 사람들과는 지금까지도 24년이 넘도록 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돌이켜보면 화정이 주도했던 이 모임은 우리에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한번은 모임 멤버들끼리 부부 동반으로 일본 홋카이도를 방문했는데 보람 있는 시간을 갖자는 취지로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인생에 대한 강연을 들었다. 김 교수는 그 자리에서 부인들과 자녀들도 참여하는 모임을 만들라고 조언했다. 그 모임도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이제는 장성한 자녀들이 불우이웃을 도우면서 서로의 경조사에 자기 집안일처럼 나서고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화정의 제안이 얼마나 값진 것이었나를 다시금 생각한다.

화정은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33년간 신문 경영의 일선에서활동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를 언론인과 경영인의 두 가지 면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경영인이라 기보다는 언론의 사명을 철두철미하게 수행한 언론인으로 본다. 인촌이 강조해온 공선사후 신의일관(公先私後 信義一貫)이라는 정신을 단 한 번도 소홀함이 없도록 철저하게 지켜나갔다.

화정을 만날 때 사업이나 언론 환경보다는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올바른 발전 방향과 정치 상황, 그리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 보람 있고 의미 있게 보낼 수 있을까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많이 주고 받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가끔은 몸담고 있던 동아일보에 얽힌 사연을 들을 수 있었다.

알려진 대로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한 동아일보의연이은 보도는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됐다. 하지만 언론 경영인으로서는 군사정권의 시퍼런 위협을 느낄 시기였다. 화정은 그 위협 속에서언론의 정도를 지키고 일선 기자들의 권익을 지켜주면서 때로는 재벌들의 부당한 유혹을 뿌리쳐야 했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신군부에 의해 강탈당한 동아방송은 평생 화정의 머리와 가슴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숙제 같은 게 아니었나 싶다. 가끔 편한 자리에서 는 동아방송을 언급하면서 “억울하다. 내가 꼭 찾아야겠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그럼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면회하고 나중 일민미술관에 초대하는 화정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화정이란 투박한 질그릇이 정말로 크다는 것을 느꼈다. 결국 그런 집념과 노력이 채널A의 탄생으로 이어진 것 같다.

화정은 우리 현대사 속에서 큰 걸음을 걸으면서도 언론 경영인으로서의 남다른 성과도 거뒀다. 그는 광화문에 동아일보 신사옥을 올리고 중앙고와 고려대에 새로운 건물을 세우는 등 하드웨어 부문에서 큰 성과를 남겼다. 나 역시 언론과 관련된 일도 했기 때문에 이런 성과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동아일보에 대한 세무조사와 탄압, 가족의 불행, 투병 등 감내하기 힘든 시간이 이어졌다. 이때의 세세한 과정과고통은 내가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말년의 화정에게서 인간적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거인(巨人)의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투병하고 있을 때 문병을 간 적이 있다. 병원에서 화정은 “이제 누라한테 가려나. 생전에 따뜻하게 못해 줬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때 ‘아, 이 사람이 거인이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 들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정은 끝까지 거인이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