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태선
김태선전 동아일보 이사·전 동우회 회장
1991년 여름, 아마 8월 하순으로 기억한다. 내가 서울 여의도 별관에 있던 동아문화센터의 운영책임자인 사무국장으로 일하던 시절이다.당시 여의도는 동쪽에만 아파트와 빌딩이 몰려 있었고, 서쪽은 고도제한에 공공건물 예정 부지로 묶여 있어 황량하기까지 했다. 서쪽에는 국회의사당과 KBS, 그리고 5층짜리 동아일보 별관을 빼고는 이렇다 할 건물이 없었다. 그래서 점심시간만 되면 오늘은 어디에서 밥을먹을지를 고민할 정도였다.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들어오니까 당직 직원이 현관까지 뛰어나와 사장실에서 급히 국장을 찾는 전화가 왔었다고 전했다. 광화문 본사 2층 사장실로 들어서자 김병관 사장은 소파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더니 책상 위의 서류를 덮고 바로 옮겨 앉았다. 일단 야단맞을 일은 아닌 것 같아 마음은 놓였지만,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첫마디가 문화센터에 간 지 얼마나 됐느냐고 물으시기에 1년 좀 넘었다고 했더니 대뜸 “광고국장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지시하는 게 아닌가. 나는 못하겠다고 했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1962년 수습기자로 들어온 이래 비서부장을 빼고는 줄곧 편집국과 논설위원실에서만 일했기 때문에 광고의 ‘광’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장은 인사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경제부장 출신이어서 재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지 않으냐, 광고국장은 신문사 경영에서 중요한 자리인데 석간인 동아일보가 조간으로 발행 체제를 획기적으로 바꿔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서 회사 나름의 조치를 강구 중이고 광고국의 조직, 인사, 운영면에서도 쇄신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니 그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김 국장 인사는 일민 명예회장의 지시이기도 하다고 귀띔했다.

결국은 승복하고 말았다.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다고 다짐하면서…. 김 사장께서는 광고국의 인사권을 국장에게 주겠노라고 약속했고, 훗날 조간 발행에 따른 광고국 기구 개편과 주요 간부진 인사도 약속대로 그대로 결재해 주셨다.

화정 회장은 동아일보 사장과 회장, 한국신문협회 회장을 지내면서 광고업계 인사들과도 각별한 교우관계를 평생 지속해온 것으로 유명하다. 한때 굴지의 제약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동아일보에 입사했고, 상무 전무 부사장을 차례로 지내면서 광고의 중요성을 사내의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술을 즐겨하고 음식이나 자리를 가리지 않는 그의 소탈한 성품 덕분에 유난히 광고업계에서 그와 알고 지낸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동아일보를 조간으로 바꾼 지 얼마 안 돼서 겪은 일이다. 주요 광고주와 대행사 사장, 광고단체 대표들을 초청해서 충정로 사옥 지하의 인쇄시설과 CTS 제작 공정을 보여주는 행사가 여러 날 계속됐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손님들을 현관에서 배웅하고 있는데 김병관회장께서 계단 위에 서 있던 나의 양복 소매를 잡고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러면서 내 귀에 대고 “이봐, 김 이사, 광고주한테 그렇게 인사하는 게 아니야” 하고 꾸중했다. 회장 말씀은 광고국장이 광고주보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그때 일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광고국장 3년 동안 연간 광고 수입이 2400억 원을 넘어섰고 1993년 4월 조간으로 바꾼 이후 경쟁지와의 광고 수입 격차도 많이 좁힐수 있었다. 광고국원 60여 명은 정말 신바람 나게 뛰었다. 개인적으로는 임원으로 승진해 보상을 받았고, 1994년 멕시코 칸쿤서 열린 세계광고인대회에 김병관 회장 내외와 함께 참가하면서 과테말라, 코스타리카 등 중앙아메리카의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호사도 누려봤다.

화정 회장 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에피소드가 있다. 1983년 내가런던 특파원 시절 당시 전무였던 화정 회장이 영국 외교부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했을 때 일이다. 시찰 코스에는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와 글래스고, 스카치위스키의 본고장인 스코틀랜드 고원 대계곡에 있는유명한 증류소 하나가 들어 있었다.

동행하자는 권유에 따라 나도 스코틀랜드 여행길에 나섰다. 글래스고 홀리데이인 호텔에 묵으며 각방을 썼는데 아침에 보니 화정 선생이 세면대에서 와이셔츠에 비누칠을 해서 직접 손으로 빨고 있지않은가. 깜짝 놀라 왜 룸서비스에 맡기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여행할 때 내복은 직접 빠는 게 가문의 불문율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40세 전에는 부부가 함께 여행하는 것도 금하고 있다고 했다.“원,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룸서비스에 맡기세요.” 그렇지만 그는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하고 물이 뚝뚝 흐르는 셔츠를 옷걸이에 걸어 침대 머리에 걸쳐 놓았다. 한 해 두 번씩 영국에 들르시는 일민 명예회장께 훗날 그 얘기를 말씀드렸더니 말없이 빙그레 웃으시던 기억이 난다.

내가 화정 회장과의 관계에서 가장 뿌듯했던 기억은 인사에 관한 것이다.

광고국장을 맡기로 하고 일어서려는 나를 다시 붙들어 앉히더니 문화센터 국장 후임자를 아무개로 내정했다고 하면서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누구든 한자리에서 3년을 넘게 있으면 타성에 젖기 쉬우니 바꿔야 하고, 후임자는 가능하다면 해당 부서에서 발탁하는 게 순리라고 말했다. 제작 부서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을 업무 부서나 영업쪽으로 보내는 것은 회사 입장에서는 정책 인사일 수 있겠으나 해당부서의 구성원들 입장에서 보자면 ‘낙하산 인사’라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설명했다. 1년 2개월 전 나를 문화센터 사무국장으로 발령을 낸 것이 바로 그런 사례라고 솔직히 말하면서 1982년 10월문화센터를 발족할 때의 창설 요원이 아직도 부국장급 고참 부장으로 있는데도 제작 부서 쪽 사람이 번번이 국장, 부국장으로 내려오고있다고 말했다.

내 후임 국장 내정자와 문화센터 고참 부장은 공교롭게 둘 다 동아방송 제작 간부 출신으로 문화센터 고참 부장 쪽이 선임 부장이었다. 그래서 문화센터의 고참 부장을 국장으로 하는 것이 옳다는 취지로 말했더니, 사장께선 문화센터 고참 부장이 선임일 리가 없다며 알아보겠다고 했다.

여의도 사무실로 돌아오자 사장께서 전화를 했다. 인사기록을 검토해 보니 당신 말이 맞다면서 후임 국장에 문화센터의 부국장대우고참 부장을 승진 발령하겠다고 약속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중간 간부로서, 짜릿한 자긍심을 처음으로 느껴본 것이다.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이사 겸 문화사업국장 때다. 어느 사원을 차장으로 승진시키려는 인사품의를 올렸는데 결재 최종 단계에서 거부됐다. 이튿날 화정 회장께 그 결재서류를 갖고 가서 인사 대상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회사와 당사자를 위해 결정을 재고해 달라고 간곡히 청을 드렸다. 설명이 끝나자마자 화정 회장은 빨간 사인펜으로 죽 그은 자리에 한자로 ‘생(生)’이라고 쓰고는 서명을 다시 하는 게 아닌가.

화정 선생의 기억력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다. 광고국장을 그만둘 때도 그랬다. 한자리에서 3년이 넘으면 매너리즘에 빠진다는 나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후임 국장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으셨다. 나는 그때도 소신껏 내 의견을 말씀드렸다.

나는 화정 선생과 일을 하며 인사권자의 너그러운 도량을 많이 목격했다. 잘못한 일이라도 빨리 제 발로 찾아가서 솔직히 보고드리면 꾸중은 그때뿐, 너그럽게 이해해 주던 그의 대인풍 모습이 지금도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