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장동식
장동식고려대 산업경영공학부 교수
내가 화정 선생을 처음 만난 건 2002년 고려대 관리처장을 맡았을 때다. 1999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화정 선생은 ‘새로운 미래 고려대 만들기’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었다. 고려대 설립 100주년을 맞아 캠퍼스를 소통이 용이한 구조로 대대적으로 혁신하는 마스터플랜이었다. 관리처장은 이사장의 뜻을 현실로 구현하는 첨병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나는 그 관리처장을 4년 6개월 동안 맡으며 화정 선생을 옆에서 지켜봤다.

내가 관리처장으로 부임하기 1년 전인 2001년 화정 선생은 흙 밭이었던 대운동장을 ‘고엑스(고려대+코엑스)’라 불리는 중앙광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이에 앞서 화정 선생은 학교법인 이사장으로서 학교를 발전시켜야겠다는 일념으로 법인발전위원회를 통해 여러 아이디어를 모았다. 얼마 후 지상엔 드넓은 광장이, 지하엔 대규모 근린생활시설이 들어서는 조감도가 만들어졌다. 전통을 중시하는 고려대 구성원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그러나 화정 선생은 ‘이게 새로운 미래 고려대’라는 신념으로 관철시켰다.

고려대는 화정 선생이 새로운 캠퍼스 마스터플랜을 가동하기 전까지는 말 그대로 ‘고대로’(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화정 선생이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해 혁신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면서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중앙광장이 고려대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떠오르자 구성원들은 ‘우리도 이렇게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혁신의 성과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화정 선생의 방향이 옳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관리처장을 하는 동안 100주년 기념관과 LG-포스코 경영관,우당교양관, 타이거플라자, 하나스퀘어광장 등 28개 건물을 신축했고 중앙도서관 등 12개 건물을 증축하거나 리모델링했다. 화정 선생이 처음에 중앙광장의 성공을 선제적으로 보여주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과정과 결과를 보며 화정 선생이 참 용의주도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00년 전통의 캠퍼스를 송두리째 바꾸는 대공사는 숱한 역경이 뒤따랐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나는 건설에 문외한이었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건설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이다. 교수 교직원 학생 등 서로 학교의 주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이 요구하는 캠퍼스 상이 제 각각이라 이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성패가 걸린 싸움이었다. 5층짜리 건물을 짓기로 했는데 갑자기 10층으로 짓자는 주장에 끌려다니면 소위 죽도 밥도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시간을 정복하는 방법은 ‘빠른 합의’라는 결론을 내리고 화정 선생을 찾아갔다. “저는 할 거면 제대로 하고 싶습니다. 건축은 누군가 주도해서 책임지고 하지 않으면 효율이 떨어집니다. 제가 책임지고 해볼 테니 전권을 주십시오. 다만 절대 사적으로 일하지 않겠습니다.” 내 말을 묵묵히 듣던 화정 선생은 그 자리에서 내게 건설에 관한 한 전권을 약속했다. 그가 보여준 믿음의 리더십은 조부인 인촌의 그것과 꼭 닮았다.

화정 선생의 신임을 재확인한 나는 법 경영 설비 건축 등 각 분야 교수를 중심으로 위원회를 만들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여기서 내려진 결론이 최종 결론”이라고 자신 있게 얘기하며 좋은 의견들을 모았다. 처음엔 반신반의하던 교수들이 자신들의 의견이 실제 건축에 반영되는 걸 보자 너도나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놨고 활발한 토론이 이뤄졌다. 화정 선생은 재단 이사장이었는데도 일절 건설에 간여하지않고 위원회의 결정을 100% 존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게 화정 선생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런 화정 선생이 새로운 고려대 건설 사업에 딱 한 번 구체적인의견을 낸 적이 있다. 문과대 앞 옛 대강당 자리는 50년 뒤 우주 시대가 될 것을 감안해 새로운 건물을 짓기 위한 예비용지로 남겨두라는 것이었다. 이 자리는 문과대와 정경대가 원하는 곳이었지만 화정 선생 뜻에 따라 10년 가까이 그 모습 그대로 남겨졌다가 지난해에야 SK의 후원으로 새 건물이 들어서고 있다.

고려대는 100주년을 맞은 2005년을 기점으로 캠퍼스를 대대적으로 바꾸고 대학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글로벌 대학으로 거듭나자는 목표로 모든 수업을 의무적으로 영어로 하게 했다. 막걸리로 대표되는 고려대가 와인을 만들었다. 당시 고려대의 개혁을 두고 총장이 주도하는 것처럼 언론에 보도됐지만 사실은 모두 화정 선생이 그린 큰 그림의 일부였다.

화정 선생은 언론에서 잇달아 호평을 받던 고려대 개혁에 대해 한마디도 공치사를 하지 않았다. 캠퍼스 건물을 새로 짓고 증축하는 데 들어간 막대한 비용을 십시일반 모금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한 건 화정 선생이었다. 하지만 학교가 바뀌면 됐지, 누가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진정한 오너십이었다. 조부인 인촌 선생의 ‘공선사후(公先私後)’ 정신을 보는 듯했다. 인촌 선생도 일제강점기 민립대학을 세우기 위해 전국 각지의 국민들에게 호소해 십시일반 자금을 모으면서도 생색 한번 내지 않았다.

화정 선생과의 마지막 대화는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2006년쯤으로 기억한다. 당시 화정 선생은 수술 부작용으로 말을 하지 못하실 때였다. 병문안을 갔더니 화정 선생이 책 한 권을 건넸다.미국 로스앤젤레스(LA)와 샌프란시스코를 잇는 서부해안도로인 1번도로에 대한 가이드북이었다. 화정 선생은 필담으로 내게 이 책을 읽어 오라고 하셨다. 그러곤 마지막으로 나와 둘이 여행 가고 싶은 곳이라고 덧붙이셨다.

그 서부 해안가는 화정 선생이 수년 전 동아일보 임원들과 휴양차갔던 곳이다. 화정 선생은 해 지는 노을에 비친 해안도로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이후 화정선생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끝내 함께 1번 도로를 달리지 못했다. 화정 선생이 병상에서 건넸던 책은 1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내 사무실 책장에 꽂혀 있다. 이후 미국 서부를 오갈 때마다 화정 선생과 활짝 웃으며 해안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