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조강환
조강환전 동아일보 논설위원·동우회 회장
고 김병관 동아일보 회장과 나는 참 인연이 깊다. 우선 출신 지역과 출신 학교에서부터 대선배였다. 같은 전북 고창 출신이며 학교도 고창초등학교, 중앙고등학교, 고려대 동문에 직장도 같은 동아일보사다. 동아일보 동우회도 김 회장이 많은 신경을 써 탄생했는데 지금 내가 회장직을 맡고 있다. 그렇지만 동아일보 사내에서 함께 근무한 적은 없다. 나는 편집국, 논설위원실에서 근무했고 김 회장은 광고 등 업무 분야에서 근무하다가 회사를 총괄하는 사장, 회장직을 맡았다.그러나 사주인 김 회장이 편집국과 논설실에 관심이 많아 편집국 인사들과 술자리 접촉이 적지 않았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지만 김회장이나 나나 고창이나 출신 학교, 또는 학교 선후배 등에 대해서는 그 오랜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언급한 기억이 없다.

김 회장은 주로 술자리에서 편집국 여러 인사들과 함께 가끔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고 숙취에 따른 춘사(椿事)도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화제가 됐었다. 술자리에서는 주로 회사 업무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김 회장은 말을 많이 하지는 않았지만 술 취하면 “아부하지마”란 말을 많이 해 주변의 눈길을 끌었다. 그러면 이야기하던 사람이 어색해하기도 하고 너털웃음으로 넘기기도 했다. 사실 특히 언론사에서 사주에게 아부하지 말아야 한다.

김 회장은 국악에 관심이 많았고 필자도 그런 자리에 함께한 적이 많았다. 필자가 사회부에서 근무하면서 보건사회부에 출입하고 있을 때 조미료 파동이 일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미원과 삼성 미풍의 싸움이었다. 관련 기사는 보사부 출입기자 주도로 이끌어 나갔다. 그 당시 기자들 중 식품업계의 마당발 미원의 노시평 홍보실장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노시평 홍보실장이 많은 자료를 각 언론사 기자들에게 돌리고 언론사에서 살다시피 했는데 노 실장이 담당 상무인이태욱을 내게 소개했고 이 상무가 미원 사장을 내게 소개해 취재를 도왔다. 그때 신용순 편집국 부국장이 이 사건을 총지휘했는데 책임있는 취재를 위해 고위층도 만나보라고 해서 이태욱 등을 만났다.

이태욱은 무엇보다 국악에 나름대로 조예가 깊었다. 국악인들과도 친분이 많았고 창도 그럴듯하게 불렀다. 북도 잘 쳤다. 필자 역시 풍류를 즐겼던 선대의 영향을 받아 특히 국악 가사에 심취해 있었다.판소리의 아버지 신재효와 국창 진채선, 김소희의 고창 출신 아닌가.어느 날 이태욱이 내게 김병관 회장이 국악에 관심이 많다는데 한번 소개해 달라고 했다. 김 회장도 사실 국악에 관심이 적지 않았다. 인촌, 김상만 회장 등 그 웃어른들도 옛날에 국악에 관심이 많았다는데 그것은 호남 출신으로 대대로 내려온 기풍 아닐까. 맨 처음 신라호텔후문에 있는 삼원에서 김 회장, 이태욱, 국악인 조상현, 신영희, 박양덕 등과 자리를 함께했다. 이들이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등을 열창했고 이태욱이 고수로 나섰다. 김 회장은 노래는 잘 부르지는 못하지만 국악에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 김 회장, 이태욱과 함께 계속해서 많은 저명한 국악인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마다 수많은 판소리를 들었다. 성창순, 안향연, 김동애, 오정숙, 강정숙, 유수정, 김미숙, 은희진, 임이조 등 많은 국악인들과 자리를 함께해 판소리 창을 들었고 국악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갔다. 그러면서 김 회장은 국악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 한번은 신영희가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이산 저산’으로 시작되는 사철가와 흥타령을 가르쳐 주었고 성창순 집에도 초대받아 창을 배웠다.

그때 우리는 삼원에서 아주 귀중한 국창을 접하게 됐다. 바로 국창 만정 김소희(金素姬) 선생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인 만정은 춘향가, 서편제 기능 보유자였다. 연로한 만정 선생은 쉰 목소리로 춘향가, 수궁가 등을 기꺼이 불렀고 취기가 오르자 “옛날엔 김상만 회장, 이병철 회장 같은 분들이 국악을 깊이 이해해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지금은 그런 분이 없어 퍽 아쉬워했는데 김병관 회장이 국악에 관심을 갖게 돼 참으로 기쁘다”며 즉석에서 살풀이춤도 추어 보였다. 원로국창이 노쇠한 몸으로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명주 수건을 휘감으며 잔가락을 이어가는 절제의 미는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동아국악콩쿠르는 바로 이때 이곳에서 탄생했다. 국악인들의 어려움과 서러움을 직접 듣고 본 김 회장이 여기에서 국악콩쿠르 창설을 결심했다. 나도 동아일보 ‘기자의 눈’에 이런 내용을 썼고 어린 국악인들 중 입술갈림증으로 창을 제대로 부를 수 없어 고통을 겪고 있는 전인삼을 서울대병원에 부탁해 무료 수술을 받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김 회장은 그 후 창극단을 이끌고 고려인들이 사는 타슈켄트 등중앙아시아 9개 도시를 순회하며 ‘아리랑’을 공연했다. 그때 조상현, 김일구, 신영희, 김성애, 손진책 등과 갔는데 필자도 동행 제의를 받았으나 내 직무와는 무관한 분야여서 가지 않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