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유인촌
유인촌연극배우·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동아일보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와 동아는 운명적인 인연”이라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우선 내 이름부터 그렇지 않은가. 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인데 인촌(仁村) 선생과 한자까지 똑같다. 이름 때문은 아니겠지만 화정 회장님은 생전에 나를 참 좋아하고 아껴주셨다. 호칭도 친근하게 ‘너’라고 부르시며 마치 동네에서 만난 형처럼 편안하게 내 어깨를 툭툭 치시곤 했다.

처음 만난 시기와 장소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문화계 사람들 여러 명이 모인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인사드리면서 처음 뵈었던 것 같다.회장님은 연극 뿐 아니라 국악에 관심이 많았고 다양한 예술인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셨다.

내가 회장님을 가장 자주 뵈었던 시기는 1990년대 초중반이었다.그때는 내가 한창 방송을 많이 하고 탤런트로 잘나가던 시절이었다.드라마를 보통 3편씩은 했으니까. 그런데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야망의 세월’을 막 끝내고 난 무렵이었음에도 회장님은 내게 무슨 드라마를 잘 봤다거나 하는 얘기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으셨다. 방송 드라마에 대한 말씀은 일절 없이 내가 하는 연극에 관심을 갖고 격려해 주신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1995년 나는 극단 ‘유’를 창단했는데 그즈음에 화정 회장님이 물심양면 응원을 많이 해주셨다. 극단을 만들고 보니 아무래도 방송 일을 줄이고 연극에 시간을 더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회장님은 TV 스타로 한창 잘나가던 내가 방송만 하면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데도 연극을 하는 걸 신통하게 여기셨던 것 같다. 나를 볼 때마다 “연극 무대에 있다가도 방송 쪽으로 가면 다시는 연극으로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는데 너는 밖(방송)에 나가 있는데 왜 다시 돌아왔냐”고 걱정도 해주셨다. 그러면서 “연극 열심히 하는 거 보기 좋다. 기왕 극단까지 만들었으니 열심히 해봐라” 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아무리 내가 좋아서 한 연극이라고는 해도 막상 극단까지 만들고 단원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내 입장에선, 말은 못해도 마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화정 회장님이 해주신 칭찬과 격려는 큰 힘이 됐다.

극단을 창단하고 몇 달 준비 끝에 6월 16일 마침내 창단 기념 공연을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대극장 무대에 올렸다. 창단 작품은 ‘문제적 인간 연산’이었다. 나는 연산을 맡았다. 우리 극단 첫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 연극으로 이듬해 1월 국내 최고 권위의 동아연극상대상까지 거머쥐었던 터라 내게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각별할 수 밖에없는 작품이다. 당시 동아연극상은 9년째 대상작을 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리 극단이 창단 기념 연극으로 너무나 큰 상을 타게 돼 모두들 흥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문제적 인간 연산’은 쟁쟁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었다. 극본과연출은 이윤택, 무대 미술은 신선희 씨였고 장녹수 역은 이혜영, 폐비윤씨는 윤복희 씨가 맡았다. 정규수 김학철도 출연했고 ‘투투’의 멤버가수 황혜영도 기생 역으로 나와 뉴스거리가 되기도 했다. 제작비도2억5000만 원이나 들인 작품이었던 터라 동아연극상 수상은 개인적으로도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과도 같았다.

‘문제적 인간 연산’을 무대에 올렸을 때 김병관 회장님도 직접 동숭아트센터에 와서 관람해 주셨다. 그날 하루만 오셨던 게 아니라 ‘문제적 인간 연산’을 공연하는 동안 대학로를 여러 차례 찾으셨다. 처음 연극을 보신 뒤 “네가 그래도 이 어려운 일을 계속하고 있으니 좋다.달리 내가 연극을 도와줄 방법은 없지만, 가끔 와서 술과 밥이라도 사주겠다”고 하셨는데 그 약속을 지키러 오신 것이다. 실제로 회장님이 오신 날이면 우리 단원들이 거하게 회식을 했다. 돌이켜보면 회장님은 늘 일요일에 오시곤 했다. 평일에 오면 다음 날 공연에 지장이 있을까 봐 연극하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러셨던 것 같다. 월요일엔 공연이 없다 보니 단원들이 가장 마음 편한 일요일 공연이 끝날 시간에 맞춰 오신 거였다.

대개는 저녁을 다른 데서 드시고 연극이 끝날 즈음에 대학로로 넘어오셨는데 그럴 때면 저녁 자리를 같이한 멤버들도 몰고 오셨다. 그 시절 회장님과 대학로에 같이 오던 멤버들 중에서는 김명하 코래드사장이 기억난다. 한번 오시면 2차, 3차는 기본이었는데 마지막 3차포장마차까지 남아있던 건 언제나 회장님과 나였다. 오시면 꼭 포장마차에서 끝났는데 매번 새벽 2시 언저리까지 둘이서 소주를 마셨다.간혹 사모님도 같이 오셨다. 그때도 역시 포장마차까지 갔지만 사모님은 술을 드시진 않았다.

회장님은 술이 들어가면 말씀을 많이 하시는 편이었다. 술 한잔하시면 “내가 뭐 해줄 건 없느냐” “뒤에서 으쌰으쌰 해주마”라고 하셨는데 들을 때마다 참 고맙고 마음 든든해지는 말이었다.

나를 유독 아껴주셨다고 생각한 건 내가 하는 연극은 거의 보러와 주셨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 연극을 그렇게 자주 찾으셨다는 얘기는 별로 못 들었다. 예술계 인사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셔서 나도 배우뿐 아니라 다양한 공연계 사람들을 두루두루 데리고 가 회장님께 인사시켜 드리곤 했다. 연극에 대한 애정도 컸지만 특히 국악을 참 좋아하셨던 분이었다. 안숙선 명창을 비롯해 국악인들과 교류도 많으셨다. 풍류를 알고 흥도 많았던 분이라 배우 유형으로 친다면 ‘끼가 많은 스타일’이었다. 대학로에서 새벽까지 술을 드시곤 발걸음을 휘청휘청하며 기분 좋게 취해 댁으로 들어가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사적으로는 친했지만 내가 공적인 일을 하기 시작하고는 거의 뵙지 못했다. 2004년 내가 서울문화재단 대표가 되고 그 이후 이런저런 공직을 맡게 되면서는 만나 뵐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서울문화재단에 있을 때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할 때도 동아연극상 시상식만큼은 지방이나 해외 출장을 가 있지 않는 한 거의 빼놓지 않고 참석했다. 회장님이 연극에 얼마나 애정이 깊은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동아연극상은 나에겐 남달랐다.

2006년 동아일보 사옥에서 열린 동아연극상 시상식에도 나는 여느 때처럼 참석해 수상 배우들의 축하 공연을 보고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문화부 K 기자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상금은 얼마나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K 기자는 “다른 부문 상금은 괜찮은데 신인 상금은 너무 적어서 수상자들에게 미안하다”며 50만 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동아연극상 운영에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데 기업들은 빛 안 나는 연극 후원은 꺼려 동아일보가 사명감과 의지를 갖고 매년 어렵게 끌고 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때는 내가 서울문화재단 대표로 있을 때라 방송 활동과 CF 출연도 자제하고 있었는데 그 얘기를 듣자마자 어떻게든 당장 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은 K기자에게 “동아연극상이 어떤 상인데. 내가 CF를 찍어서든 아무튼 수를 내볼게” 하고 내 뜻만 전달했다. 그 후 마음으로 생각만 하고 있다가 이듬해 신창건설 CF 제의가 들어오자 바로 승낙했다. 당시 내 개런티는 4억 원이었는데 절반인 2억 원은 동아연극상에 써달라고 동아일보에 내놓았다. 나머지 2억 원은 내가 몸담고 있던 서울문화재단에 기부했다. 동아일보측은 내가 거듭 사양했음에도, 감사의 뜻으로 신인상 앞에 ‘유인촌 신인배우상’이라고 내 이름을 붙여주었다.

연극인에게 동아연극상 수상은 최고의 영예이지만, 전체 연극계에도 동아연극상은 정말 고마운 상이다. 아무도 연극에 관심을 갖지않던 시절에 연극 발전을 위해 정말 많은 역할을 했다. 그런 동아연극상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한 건 연극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었다. 동시에 오래전 회장님이 내게 주신 애정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요즘은 김병관 회장님 같은 분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문화예술계를 그렇게 애틋한 마음으로 챙겨주신 어른은 아마 회장님이 마지막이 아닌가 싶다. 그야말로 멋과 풍류를 아시는 분이었다. 솔직히 요새는 다들 깍쟁이들이라 그런 분이 없다. 그분과 함께했던 그 시절은 낭만이 남아있던 마지막 시절이 아니었을까. 새삼 그분이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