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남시욱
남시욱화정평화재단 이사장
1985년 여름이었다. 당시 화정 선생은 동아일보 부사장이었고, 나는 편집국 부국장을 하다가 출판국장으로 승진한 지 2년 만이었다. 제5공화국, 즉 전두환 신군부정권이 출범한 지 4년이 넘었지만 언론 상황은 1979~80년의 비상계엄 아래서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책임을 맡고 있던 출판국에서 만드는 월간 ‘신동아’ 7월호의 광주항쟁 특집기사 때문에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지금도 그렇지만 월간지는 공식 발행 일자보다 1주일 내지 열흘정도 먼저 시판되는 것이 관례여서 6월 24일에 7월호가 서점에 깔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신동아’ 7월호는 불티가 나듯 팔렸다. 그러나 발매 하루가 지난 25일 보안사가 갑자기 제작진을 연행해 가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사를 쓴 기자는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담당 부장은 기사를 쓴 저의가 무엇이냐고 심한 추궁을 받았다. 국장인 나 역시 맨 나중에 연행되어 밤샘 조사를 받았다. 자칫했으면 사건이 크게 번질 뻔했는데 화정이 보안사령관과의 대화를 통해원만하게 사건을 수습하는 데 성공했다. 연행당한 세 사람은 이튿날새벽에 풀려나고 ‘신동아’의 인기는 천정부지로 올라가 동아일보사는 완전한 판정승을 거두었다. 사건의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은 당시 비상계엄 아래서 일어난 사건이기때문에 자동적으로 군 당국의 엄중한 언론 검열 대상이 되었다. 신군부정권은 세월이 한참 지난 다음에도 언론이 광주항쟁의 진상을 취재하지 못하도록 엄격하게 통제했다. 정부가 광주항쟁에 대한 보도 금지를 해제할 때까지 한 줄도 써서는 안 된다고 강압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사건 발생 5년이 지난 1985년 6월 중순 어느 날 당시 공보부 차관이었던 김윤환 씨가 조선일보사가 발행하는 ‘월간조선’에서 광주사태 특집기사를 내겠다고 하기에 이를 양해해 주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마침 우리 ‘신동아’에서도 광주항쟁에 관한 장편의 르포 기사를 준비해 두고 게재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터여서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라고 나는 판단했다. 나는 바로 회사로 돌아가 이정윤 신동아부장에게 윤재걸 기자가 써 놓았다는 광주 르포 기사를 잘 다듬어 출고하도록 일렀다.

윤 기자의 원고를 읽어 보니 당시 광주의 참상은 참으로 엄청난 내용들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윤 기자가 쓴 원고는 사건 직후 황석영 등 당시 광주의 반신군부 문인들을 비롯한 진상조사위원들이 작성한 진상보고서를 기초로 해서 르포 형식으로 기사화한 것이었다. 생생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해서 필력이 있는 윤 기자가 부드럽게 윤색을 했기 때문에 이 기사는 독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기사의 제목도 멋지게 붙였다. ‘다큐멘터리-광주, 그 비극의 10일간’이라는 자극적인 표현이었다. 당시까지도 여전히 베일에 가려진 광주항쟁의 진상은 많은 국민들이 궁금해하던 바였다.

그런데 윤 기자는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기사의 중요한 대목들에 대해 증거를 대라면서 추궁하는 조사관으로부터 혁대로 얻어맞았다.나는 이 부장이나 윤 기자에 비해서는 신사 대접을 받은 셈이다. 조사 과정에서 내가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이종구 장군(나중에 전두환 정권에서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었다)의 고교 동기동창이라는 사실을 조사관들이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사연이 있었다. 우리가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는 시간에 이 장군과 동아일보의 부사장인 화정이 전화를 통해 담판을 시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조사관은 나에게 와서 “우리가 조사해 본 바로는 국장께서는 이 기사에 대해 별다른 직접적인 책임은 없으신데, 왜 자꾸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말합니까. 가만히 계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고는 더 이상 조사를 하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이 되자 대공분실장이라는 준수하게생긴 청년이 나타나 자신은 육사 출신의 소령이라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이제 조사는 다 끝나고 일도 잘 해결되었다고 내게 알려주었다. 대공분실 측은 우리 세 사람을 남서울호텔 주차장까지 차로 모실테니 회사 차를 그곳으로 부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나중에 화정에게 신동아 사건 때문에 수고가 많으셨다고 감사를 표시했다. 이종구 사령관과는 어느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었는지를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 사령관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건 것 같다. 그가 서점에 나간 ‘신동아’를 회수해서 기사 가운데 문제가 된 대목들을 삭제하라고 요구하면서 화정과 대화가 시작되지 않았나 짐작했다.

이런 방식의 수습책은 당시에 정부 당국과 언론사 간에 자주 이루어진 타협 방식이지만 언론사로는 아주 유리한 해결 방식이다. 왜냐하면 보안사가 문제의 ‘신동아’가 발매된 다음 날 조사에 착수한 데다가 우리 측과 수습 방안을 타결하는 데 다시 하루가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신동아’를 회수한다지만 이미 이틀 동안 많은 부수가 독자의 손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서점 측도 반품에 협조를 잘 안 하는 것이 보통이다.

여하간 문제의 ‘신동아’ 7월호는 엄청나게 팔리고 특히 광주에서는 인기가 폭발했다. 반면에 경쟁지인 ‘월간조선’은 불매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 무렵 ‘신동아’는 평소에도 ‘월간조선’보다 훨씬 부수가 많았다. 잘 나갔을 때는 40여 만부가 나갔다. 이로 인해 ‘신동아’는 출판국의 달러박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 ‘신동아’는 3공화국의 비화를 많이 다루었고 특히 장도영 회고록 게재를 계기로 부수가 치솟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대통령 직선제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인기가 올라갔다. 이때 출판국이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각 부장을 비롯한 국원 전원이 열심히 일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문에 비해 월간지에 대한 당국의 언론 통제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틈새를 잘 활용한 제작 전략 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상만 회장께서는 출판국장 취임 2년 만에 나를 이사로 승진시켜 주고 가끔 여의도의 내 사무실까지 불쑥 왕림해 격려해 주었다.

이 무렵 화정도 출판국이 잘되는 모습에 대해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 주었다. 한번은 화정이 기발한 동아일보 홍보 문안을 내게 보여주었다. 광화문 옛 사옥 2층 베란다 쪽에 있던 그의 사무실에 들렀더니“남 이사, 이 홍보 원고 어때요?” 하고 물었다. 그 홍보 문안은 이렇게 되어 있다.

‘신동아를 발행하는 동아일보사의 일간지-동아일보’ 나는 잠자코 웃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승부사 기질을 가진 화정은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각 매체의 부수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화정은 출판국에서 자체적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다는 조건 아래서 국장인 나에게 출판국 운영에 대해 전권을 주다시피 했다. 그래서 나는 출판국에서 발행하는 월간지를 ‘신동아’와 ‘여성동아’ 이외에 더 늘리기로 결정했다. ‘과학동아’와 ‘음악동아’를 창간하고 ‘월간 멋’이라는 패션잡지를 사들였다. ‘음악동아’는 내가 클래식에 취미가 있기도 했지만 당시 동아일보사에서 김상만 회장이 앞장서서 유럽의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한국에 초청하던 시절이어서 고전음악 애호가들이 상당히 많았다. 내가 새 잡지 창간안 결재를 올리자 ‘신동아’가 워낙 잘되는 시절이어서 화정을 비롯한 경영진이 무조건 오케이했다. 새로 창간한 세 잡지 중에서 ‘과학동아’는 지금도 잘되고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머지 두 잡지는 제작진의 역량 부족이나 영업력 부진때문인지 아니면 시대의 변화 때문인지 여하간 적자가 계속되자 폐간되었다. 지금 회고해 보면 나는 화정의 전적인 뒷받침 덕을 입어 나름대로 아주 화려한 3년 10개월 동안의 출판국장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화정과의 일화는 너무도 많지만 나는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편협) 일로 화정에게 신세를 진 일만은 우선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내가 편협에 직접 관여한 것은 1989년 한국일보의 조두흠 주필이 편협 회장에 취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와는 법조 출입 때 친하게 지낸 사이인데 당시 동아일보 논설실장이었던 나를 위해 수석부회장이라는 직위를 만들었다. 2년 후 조 회장은 임기를 마치자 자동적으로 나를 차기 편협 회장으로 추천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바로 그해에 화정이 한국신문협회장에 선임되었다. 한국 언론계의 3개 직능단체-신문협회와 편협과 기자협회- 중 두 단체를 동아일보사에서 차지하는 것은 다른 회사에서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이 들어 나는 이를 사양했다. 따라서 나와 함께 부회장을 하던 조선일보사의 안병훈 부사장을 회장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조 회장에게 진언했다. 조 회장도 납득해서 그가 새 편협 회장에 선출되고 나는 부회장에 유임되었다. 안 회장 체제가 출범하자 나는 편협의 궁핍한 재정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신임 김병관 신문협회장을 방문하자고 제의했다. 안 회장도 동의했다. 나는 안 회장을 앞세우고 화정을 방문해 신문협회에서 편협에 매달 지원금을 달라고 요청했다. 화정은 그 자리에서 쾌락했다. 신문협회가 매월 100만 원씩을 편협에 지원하기로 했다. 이로써 나는 화정에게는 신임 신문협회장으로서 보람 있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건의를 함과 동시에 편협 측에도 체면을 세운 셈이었다. 편협의 살림에 그만큼 여유가 생긴 것이다. 나는 안 회장이 임기를 마친 1993년에 제10대 편협 회장에 선임되었다. 편협 회장은 현직 언론인에게는 가장 영예로운 직책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