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한승주
한승주전 외무부 장관·고려대 명예교수
2002년 6월 중순, 여름 방학이 시작하는 어느 날 이른 아침에 뜻밖의 손님 한 분이 옥수동에 있는 우리 아파트를 찾아오셨다. 문을 열어 보니 당시 동아일보의 회장이시고 고려대의 이사장을 맡고 계신 김병관 회장님이셨다. 손에는 큰 과일 봉지를 하나 들고 오셨는데 무엇인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오신 것 같았다.

예상 밖으로, 또 예고 없이 손님을 맞은 우리는 부랴부랴 거실을 정리하고 김 회장님을 맞아들였다. 얼마 만에 운을 떼신 김병관 이사장님 말씀은 당시 고려대가 교내 분규로 후임 총장의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누군가 임시로나마 총장직을 맡아줄 사람을물색해야 하는데 그 문제로 고민하느라고 그 전날 한잠도 못 주무셨다는 것이었다. 나에게 당분간이나마 총장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러오신 것이었다.

당시 총장직은 교수, 학생, 이사회, 교우회, 직원 등의 대표로 구성된 총장 추천위원회가 추천하는 후보자 중 한 사람을 이사회가 추인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원래 나는 총장을 선거에 의해 선출하는 방식에는 반대하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총장 후보를 선거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정치화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직선제의 성격을 갖는 총장 선출 제도를 반대하는 내용의 신문 칼럼을 쓴 일도 있었다. 그런데, 총장 서리라는 직은 임시적이긴 하지만 총장으로서의 모든 권한을 행사하게 되어 있었던 만큼 총장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교수들을 제쳐놓고 그 직책을 내가 가로채는 것 같아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처음에는 완곡히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병관 이사장께서는 학교를 위해 고심 끝에 내린 결단이었다며 학교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누군가 보직에 욕심 없는 사람이 사심 없이 학교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었다.

그때 나에게는 이사장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할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나에게는 미국에 살고 있는 5년 연상의 막내 삼촌이 계셨는데 그분이 김병관 이사장님과 고려대 경제학과 동기생으로 막역한 사이였다. 그래서 나는 이사장님을 친 삼촌과도 같이 친근하게 느끼고있었다. 그 2년 전인 2000년에는 미국에서 나와 사제 관계에 있던 이사장님의 차남 재열 군의 간청으로 삼성 이건희 회장님의 차녀 서현양과의 결혼 주례를 맡은 일도 있었다.

결국은 임기가 불확실한 총장 서리직을 맡아 교내의 혼선을 어느정도 정리하고 후임 총장을 순조롭게 선출한 후 8개월 만에 나는 다시 평교수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김병관 이사장께서 얼마나 고려대를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학교의 발전과 성장을 위해 노력하시는가를 알게 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고려대와 연세대는 매년 가을 연례 고연전(연세대는 연고전이라고 부른다)을 갖는다. 내가 총장 서리를 맡기 전 몇 년 동안 고려대가패배의 고배를 마셔 왔는데 운 좋게도 나의 임기 중에 열린 두 학교쟁패전에서 고려대가 축구, 럭비, 야구의 세 종목을 이겨 몇 년 만에 고연전을 3-2의 승리로 이끌었다. 이사장께서는 마치 자신의 자제가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은 것보다도 더 기뻐하시면서 나에게 축하의포옹을 크게 해 주셨다. 나는 특별히 공을 세운 것 없이 승리의 크레디트를 받은 것이 다소 멋쩍었으나 이사장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니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기뻤다.

김병관 이사장님은 또한 대학 발전 기금 마련에 앞장서셨다. 나는 원래 모금에는 재주가 없는 백면서생이었으나 이사장님의 적극적인노력과 리더십에 힘입어 일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후일 이사장께서 성대 수술로 육성을 잃고 입원해 투병 중 이실 때 찾아뵈면 필담을 하시면서도 학교 발전과 나라 걱정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병관 이사장님은 또한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 우리나라의 통일과 외교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셨다.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를 설립하셨을 뿐 아니라 1995년에는 고려대 부설 일민국제관계연구원 설립을 지원해 주시고 나로 하여금 그 초대 원장을 맡도록 해주셨다. 지금 일민국제관계연구원은 한국의 유수한 국제 관계 연구기관으로 발전하여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우리나라의 평화, 안보, 통일, 외교 분야의 연구와 인적 교류에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김병관 이사장님은 우리나라의 언론과 문화 부문에 크게 기여하고 업적을 남기셨을 뿐 아니라 대학 발전, 외교 안보 분야에서의 연구와 인재 양성에도 막대한 기여를 하신 분이다. 그분의 활동과치적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었던 것을 나는 큰 영광과행운으로 생각한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