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병수
김병수전 연세대 총장
대인(大人) 김병관 회장 10주기를 맞아 추모의 글을 쓰자니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가 먼저 떠오른다. 일제강점기는 물론이고 광복 이후 혼란기에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탁견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건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인촌 선생은 조선 말기 선진화 과정에 우리가 대응하지 못한 것을 극복하고자 조국의 산업화, 교육과 인재 양성, 언론을 통한 국민 계몽에 앞장서셨다.

우리나라의 자본이라고는 농토뿐이던 일제강점기는 지주 중심의 사회였다.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고 그들은 가난했기 때문에 이념화되기도 쉬웠다. 전북 고창 출신의 자본가인 인촌 선생은 송진우, 장덕수, 백관수 등 유능한 청년들을 발굴하고 일본 유학을 통해 구미 선진문화와 자유민주세계를 경험하게 하였다.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지닌 이들과 인촌은 이승만 박사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을 건국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의 혼란기에 동아일보가 자유민주주의를 주창하며 국민 여론을 정도로 이끌어 온 과정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건국사이기도 하다.

나의 선친은 평생 동아일보 독자로 자유민주주의 건국이념을 지키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동아일보를 교과서처럼 공부했다. 이런점들이 오늘날까지도 내 사회생활의 지식 기반이 되어 주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초등학교부터 동아일보를 읽기 시작해 대학 생활 중에도 동아일보를 열독하니 친구들은 내게 ‘동아일보’라고 별명을 붙여주었다. 의과대 졸업앨범에는 내가 동아일보를 읽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을 정도다.

내 고향 강원도 횡성은 가난했고 6·25 남침전쟁은 처참했다. 중공군 개입으로 1·4후퇴 위기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우리는 열심히 공부했다. 당시 유엔 한국부흥단(UNCRA)이 원조한 교과서를 제외하고 읽을 만한 것은 동아일보가 유일했다. 같은 시대를 보내며 김병관 회장의 모습을 돌이켜보니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예견해 동아일보와 고려대를 발전시키시고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정신을 이어받은 선각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김 회장은 남에게 감동을 주시는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어 한번 만난 사람은 존경하고 따르게 만드는 분이었다. 영감지능도 뛰어났다. 사람의 인품을 파악하는 능력이 출중해 수많은 인재를 발굴했다.김 회장은 내가 1974년 미국 하버드대 의대 암병원의 안정된 교수직을 버리고 조국에 돌아온 걸 높게 평가해 주셨다. 귀국해서 연세암병원에서 열심히 학문을 가르치고 진료하는 나를 만날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96년 연세대 총장으로 선임되니 특별하게 축하해준 깊은 우정에 지금도 머리 조아려 감사한다. 동아일보와의 특별대담을 제의하신 배려도 잊지 못한다.

김병관 회장은 내게 “고려대가 각 학문 분야에서 연세대를 뛰어넘어 앞서가는데, 단지 세브란스병원을 이기는 데 힘이 부족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대학본부에서 의대를 전폭적으로 지원하고자율권을 주실 것을 권고드렸다. 그 후 김 회장은 여러 사람의 의견을 두루 경청해 고려대 의대를 최고의 대학으로 발전시키셨다.

나는 김정배 고려대 총장과 함께 고려대와 연세대의 행정 책임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미래 고등교육의 전망을 토론하도록 하였다.

김 회장은 인촌기념재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인 인촌상(仁村賞)의운영위원장도 김정배 총장에게 맡겨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정착시켰다. 김 회장과 김정배 위원장은 인촌상운영위원회교육분과 심사위원장을 내게 맡겨 주셨다. 우리나라 교육에 크게 공헌한 분들을 발굴해 인촌상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런 기회를 주신 김 회장께 항상 감사한다. 동아일보와 김 회장의 높은 뜻을 간직하고자 나는 채널A 설립 때 자진해서 주주로 참여하였다.

김병관 회장은 우리나라의 중요한 시대적 상황마다 항상 중심에 있으면서 우리 사회를 위해 고민하셨다.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건강은 돌보지 않았고 그래서 일찍 작고하신 것이 통탄스럽다. 김 회장을 모시고 현재의 조국의 앞날을 자문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김 회장은 저 하늘에서 자신이 이룩해 놓은 모든 일과 우리 사회의 인재들을 넉넉한 마음으로 지켜보실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