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명박
이명박제17대 대통령
화정 선생이 돌아가신 지도 어느덧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화정 선생은 개인적으로 나의 대학 선배로서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다.

화정 선생은 평소 과묵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옳다고 판단한 일에는 어떠한 타협도 없이 행동에 나섰다. 소탈하고 검소했으며 술을 한잔하면 구수한 목소리로 노래를 하는, 멋과 풍류를 아는 분이었다. 무뚝뚝한 외모와 달리 세심한 배려로 잔잔한 정을 느끼게 했다.

2008년 2월 25일 나는 대한민국 17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날 눈이 많이 내렸다. 청와대를 온통 뒤덮은 눈을 보며 향후 국정운영을 고민하던 차에 화정 선생이 별세하셨다는 비보를 접했다. 취임 직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이었지만 만사를 제치고 영결식장을 찾았다. 나에겐 정말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영결식장에서 나는 화정이 지키려 했던 동아일보의 역사를 새삼 재확인할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일제강점기 동아일보가 윤봉길 의사 의거를 처음으로 보도했던 일이 화제에 올랐다. 1920년 창간한 동아일보는 반일시위 보도 등의 이유로 총독부에 의해 배포 금지, 정간 등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동아일보는 민족정론지로서 중심을 잃지 않았다. 이런 정신은 광복 후 백지광고 사태를 견디며 군사정권 시절을 헤쳐 나가는 자양분이 됐다.

인촌 김성수 선생으로부터 시작된 이런 전통을 이어가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중압감을 느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화정 선생은특유의 뚝심으로 동아일보의 전통을 지켜 나갔다. 전두환 정부 말기인 1987년, 화정 선생이 발행인으로 취임한 그해 동아일보는 경찰의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특종 보도했다.

군사정부의 감시와 검열이 서슬 퍼렇던 시기였다. 당시 발행인으로서 화정 선생이 느꼈을 압박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아일보는 연일 관련 내용을 보도하며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촉발시켰다. 화정 선생의 정론직필에 대한 열정이 대한민국 민주화 역사에 큰 획을 그은 것이다.

이후 동아일보는 권력에 대한 비판과 견제라는 언론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이어갔다. 동아일보는 대한민국의 버팀목인 자유민주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행태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해 왔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보도해 온 언론인으로서 화정 선생의 삶은 우리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겼다.

화정 선생은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교육자로서도 나에게, 세상에 많은 영감을 줬다. 화정은 2001년 7월 동아일보사 명예회장에서 물러나 모교인 고려대 일에 전념했다. 2005년 내가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고려대 개교 100주년 행사에 참석해 화정 선생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당시 화정 선생이 “세계가 하드 파워의 시대에서 소프트 파워의 시대로 변하고 있다”며 혁신과 변화를 강조했던게 아직도 생생하다.

화정 선생은 그보다 10여 년 앞선 1994년에도 미래지향적인 환경운동을 목표로 하는 그린스카우트 캠페인을 시작했다.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에게 환경의 중요성을 알리고 환경오염 감시와 환경보전운동에 동참하게 하는 캠페인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이는 내가 재임 시절 주창해 국제사회로 확대시킨 ‘녹색성장’과 그 맥을 같이하고있지 않나 생각된다.

요즘은 미디어 환경이 워낙 급변하고 있다 보니 주요 언론들이 시대정신을 이끌고 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자극적인 기사를 쓰고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지난 100년간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라는 창간 이념을 지켜 왔던 동아일보만큼은 이 같은 세태를 개선하고 언론의 중심을 굳건히 잡기 바란다. 그것이 화정 선생이 언론인으로서 보여줬던 선구자적 혜안과 의지를 받들고, 동아일보가 새로운100년을 준비하는 길일 것이다. 오늘 화정 선생이 다시 그리워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