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정배
김정배전 고려대 총장
화정 선생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내가 1998년 고려대 총장으로, 한해 뒤 화정 선생이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제11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평소 잘 아는 분이었지만 특히 이사장과 총장으로 손발을 맞춰 고려대 개혁과 변화를 일궈낸 사연이 있어 곁에서 모습을 지켜볼 기회가 적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화정 선생은 약주를 즐기고, 난 한두 잔 술을 입에 대지만 두 번째 술자리, 2차는 절대 사양하는 걸 신조로 지킬 정도다.겉으로 보기에는 스타일이 꽤 달라 보였지만 고려대 개혁이라는 큰 사명 앞에서는 한배를 탄 입장이었다.

1990년대와 지금의 고려대는 하드웨어에서 큰 차이가 있는데 이런 변화는 모두 화정 선생이 이끈 것이다. 화정 선생이 1999년 이사장에 취임한 후 집중했던 일이 고려대 100년(2005년)을 위한 그랜드마스터플랜 수립이었다. 무엇보다 화정은 교육 인프라 확충에 열정을 쏟았다. 그 결실이 바로 100주년 기념관과 화정체육관, 그리고 중앙광장이다.

2000년 초반의 일이다. 어느 날 화정 선생을 이사장실에서 만났는데 문득 “내가 어젯밤에 학교 몇 군데를 다녀봤어요. 난 정말 그렇게 좁은 줄 몰랐어. 지하에 주차장을 한번 만들어 봅시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고려대는 주차 문제가 심각했다. 학교 정문 뒤 큰 운동장이있는 것이 명문대 위상에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올 때였다. 그래서 지하 주차장을 만드는 문제를 말씀드렸더니 며칠 뒤 화정 선생은 저녁 시간 경영대학원과 언론대학원 등 건물 주변을 직접 돌아보면서 주차난의 심각성을 눈으로 확인한 뒤 결단을 내린 것이다.

변화를 시도하려면 또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고 해서 우여곡절이 생겼지만 화정 선생의 굳은 결심은 바뀌지 않았다. 2002년 3월 5일 준공식 때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잘한 것 같다”고 기뻐하시던 게 기억난다. 고려대는 여러모로 모습이 바뀌었지만 그중에서도 중앙광장이 고려대 변화의 가장 상징적인 모습이 아닌가 싶다.

화정체육관은 국내 대학의 종합체육관 중 최대 규모다. 학생들을 위한 번듯한 체육공간을 마련해야 했고 학교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고 판단해 짓게 됐다. 2004년 10월 고려대 체육관으로 첫 삽을 뜨고 2006년 7월 준공되었으며, 화정이 돌아가신 후 그의 뜻을 새겨화정체육관으로 명명되었다. 해외 명문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지금의 고려대 하드웨어는 이렇게 화정 시절 대부분 이루어졌다.

교육 경영인으로서의 화정 선생의 면모는 “50억요?”라는 말에서 생생하게 기억한다. 당시 학교 발전을 위해 여러 기업으로부터 모금활동을 활발히 벌였는데 “○○로부터 100억 원을 모금했다”고 보고하면 꼭 놀라면서 “50억요?”라고 반문했다. 다른 기업으로부터 150억 원을 모금했다고 해도 꼭 “50억요?”라고 다시 물었다. 그런데 교수 한 분이 어느 프로젝트 때문에 예산 몇억 원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화정 선생은 그 자리에서 암산으로 1만 원 단위까지 계산하며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돌이켜 보니, 매번 물어본 ‘50억’은 모금하느라 정말 애썼다는 의미를 담은 화정의 화법이었다. 또 경영인으로서 학교와 관련한 재원을 치밀하게 따지며 돌다리도 두들겨 가는 화정의 꼼꼼한 경영 셈법이었다.

화정 선생은 인촌 가문이 오랫동안 그랬던 것처럼 무엇보다 사람을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분이었다. 화정 선생은 사람에게 일을 맡겨보고 믿음이 가면 간섭하지 않고, 통 크게 맡기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면서 주변의 온갖 얘기는 본인만 담아두고, 마음껏 일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사람들은 애주가인 화정 선생의 술과 관련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화정 선생만의 독특한 인재 감별법 아닌가 싶다. 사람들이 약주를 많이 하면 별소리를 다 하게 되는데 화정 선생은 취할수록 기억력이 더 좋아졌다. 취중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 지켜본 것이다.

인촌 가문에서 고려대를 다니고 졸업한 것은 화정 선생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고려대에 대한 애정은 상상을 초월했다. 고려대를 설립한 인촌 선생의 업적을 이으면서 고려대를 최고로 발전시켜야 조상을 제대로 뵐 수 있다는 의무감까지 느껴졌다.

인촌의 공선사후(公先私後) 정신이 뼛속 깊이 배어 있어 학교 경영의 요소요소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표적인 것이 인사와 관련한 대목이다. 고려대 관련 업무는 물론이고 인촌상, 인촌기념회 등 여러 일로 화정 선생을 접했지만 맹세코 단 한 번도 “아무개 신경 잘 써 달라”는 식으로 인사, 상훈과 관련한 부탁을 받은 적이 없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재를 누구보다 아끼지만 공익과 사익을 가리는 인촌 선생의 정신이 DNA에 새겨져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고려대 발전이라는 자신의 책무를 두고 화정은 앞을 내다보면서 고민했다. 인촌의 정신을 지키면서 각계와 두루 많은 인맥을 쌓았다. 신문사를 경영하고 학교 일을 하면서 외풍과 파도를 막아야 할 큰 방파제의 역할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화정 선생, 학교와 사회를 위해 더 큰 일을 많이 하셨을 텐데 아쉽다. 그렇게 급하게 가실 줄은 몰랐다. 아직도 농담처럼 하시던 말씀이 내게는 가장 큰 칭찬 아니었나 싶다. “얼굴은 곱상한데 고집은 황소고집이야!”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