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오정소
오정소전 국가보훈처장
회장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흘렀다. 세월은 화살처럼 흘러갔지만 회장님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만 간다. 2008년 회장님이 임종을 앞둔 즈음 내가 지인들과 함께 병문안을 갔을 때가 떠오른다. 회장님은병원 밖으로 잠시 나가자고 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분이 밀폐된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함께 식당에 들어갔는데 술 한 잔을 따라 주셨다. 그러면서 살가운 대화를 나눴다. 지금도 그 따뜻한 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내가 회장님과 맺은 인연은 정보기관에서 일해 온 이력이 밑바탕이 됐다. 직업 특성상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의 오피니언 리더들을 두루 만나야 했고, 회장님은 우리 언론계의 어른이었다. 첫 만남 이후 인연의 끈은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굵직한 현안은 물론이고 사소한 일상사까지 만남의 주제는 거침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자리에서 누구보다 회장님 옆을 지켜볼 기회가 많았다. 회장님과 부부 동반으로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회장님 부인이 “웬만한 정부 관계자가 집에 전화를 걸어 와도 잘 받지 않는 분이 오장관님 전화는 밤늦어도 받는 걸 보고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럴 정도로 나는 회장님과 가까이 지내 왔다. 지금도 회장님과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회장님이 걸어온 길은 한마디로 ‘공선사후(公先私後)’였다. 개인보다 공공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촌, 일민에서 회장님으로 이어지는 김씨 가문의 명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도 강했다. 공선사후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회장님은 “무엇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원칙이 확고했다. 사소한 것도 그냥 넘기지 않을 정도로 사람에 대한 관찰력이 남달랐다.

회장님은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가볍게 대하지 않았다. 어렵게 모셔왔거나 중책을 맡긴 뒤에는 예우를 아끼지 않았고, 최대한 권한을 부여했다. 회장님을 거쳐 간 사람들 중에서 말과 실제 행동이 달라 표변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회장님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지만 서운한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이렇다 보니 억울한 공격을 당하는 상황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회장님은 상대방을 배려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거인(巨人)다운 모습이었다.

나는 회장님과 함께 종종 해외여행을 했다. 호기심이 많은 이유도 있었지만 해외 주요 도시에 갔을 때 회장님이 나에게 반드시 주문하는 것이 있었다. 현지의 다운타운과 시장을 둘러보자는 것이었다. 다운타운과 시장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인 만큼 이곳을 찾아 현지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가장 번화한 장소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관찰하면 그 나라의 명운까지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속한 조직, 나아가 나라의미래도 보인다는 사람 중시의 철학을 엿볼 수 있었다.

회장님은 영원한 신문인이었다.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었다. 회장님에게 동아일보는 인촌, 일민에 이어 3대를 이어온 가업(家業)이었다. 창업주인 인촌 선생을 중심으로 칠흑같이 어두웠던 일제강점기에 한 줄기 빛을 던졌다. 회장님은 지금까지격동의 역사를 헤쳐 나온 유서 깊은 신문의 운영을 책임져야 하는 중압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사석에서도 회장님은 나에게 그런 소회를 자주 토로했었다.

회장님은 동아일보가 대한민국 여론을 이끄는 최고의 신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다. 이 때문에 회장님은 동아일보 지면 중에서 특히 사설은 하루도 놓치지 않고 숙독하며 그날의이슈를 챙겼다. 영원한 신문인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잘 드러내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간섭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했던 것이다.

회장님은 지금 동아일보의 광화문 사옥을 신축하는 등 제2의 광화문 시대를 열었다. 급변하는 시대를 내다보는 혜안도 있었다. 본격적인 정보화 시대를 염두에 두고 정보기술(IT) 전문가인 오명 장관을동아일보 사장으로 전격 영입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판에 박히지 않고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는 탄력적 사고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회장님은 말이 없고 겉으로 투박한 인상이었지만 세세한 정이 많았다. 성격도 상당히 소탈했다. 많이 알려졌듯 회장님은 동아일보사인근 무교동의 용금옥 부민옥 같은 허름한 식당을 즐겨 찾았다.

수많은 사람들과 술자리를 했으면서도 회장님은 근검절약을 솔선수범했다. 회식 자리에서 음식이 남으면 싸서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여행을 다닐 때는 되도록 고급 호텔보다 깨끗하면서도 저렴한 호텔을 선호했다. 네팔에 갔을 때의 일이다. 호텔방에 들어가 안내책자를 보고 숙박비가 300달러 정도 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다른 호텔로 옮기자고 했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했다.

신문인의 길은 필연적으로 권력과의 긴장 관계를 불러왔다. 권력에 대해선 ‘불가근불가원’ 원칙을 철저히 견지했다. 회장님이 동아일보 발행인이 된 19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그해 1월 19일자 동아일보는 1면에 ‘물고문 도중 질식사’ 제하의 관련 기사를 전진 배치했다. 동아일보가 연일 특종 보도한 박종철 사건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이나,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권력에 문제가 있으면 동아일보의 필봉은 매서웠다. 회장님은 단호할 때는 아주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김영삼 정부 시절 손명순 여사 지갑 관련 보도가 논란이 됐을 때다. 당시 정권의 실세였던 이원종 대통령정무 수석비서관이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그 보도와 관련해 챙겨봐 주세요.” 전화를 받은 회장님은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가 아직 형님 동생 할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기본 관계가 있어야지.” 당시 이전 수석은 실세 중 실세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회장님이 이 수석의 사과를 받으면서 두 사람이 화해하는 데 3년이 지나야 했다.

회장님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으로 뺏겨야 했던 동아방송에 대한 회한이 많았다. 자신이 있을 때 동아방송을 되찾아 와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유력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동아방송 강탈의 문제점을 정면으로 거론했고, 법정 소송도 마다하지 않았다.

동아방송의 맥을 잇는 채널A가 개국 6주년을 맞고 순항하고 있다. 회장님이 이 장면을 본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회장님이 교류한 사람들의 폭은 넓었다. 국민 통합의 메시지가 깔려 있다는 생각이다. 특히 한번 인연을 맺은 사람이 힘들 때 더 살뜰하게 챙겼다. 단적인 예가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전 전 대통령에 대해선 동아방송을 빼앗아간 언론 통폐합 문제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1995년 구속되자 회장님은 면회를 갔다. 회장님은 당시 민감한 정치적 기류는 개의치 않았다. 회장님의 면회 신청이 뜻밖이었던지 전 전 대통령은 상당히 감동한 표정이었다. 회장님을 만난 전 전 대통령은 “기왕 면회를 오셨으니 함께 수감된 노태우도 만나보고 가시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은 “당신과는 ‘악연’이라도 인연이 있지만 노 전 대통령과는 연이 없다”며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회장님의 시선은 대한민국의 틀에 머물지 않았다. 민족지 동아일보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 남북한을 아우르는 한반도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했다. 북한 정권이 옳으냐 그르냐는 차원을 뛰어넘어 남북 화해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지 고심을 거듭했다. 우선 회장님은 한반도 문제의 실사구시적 해법을 찾기 위해 2000년 21세기평화재단(화정평화재단의 전신)과 21세기평화연구소를 설립했다. 앞서 1998년 10월엔 동아일보 대표단을 이끌고 8일간 북한을 방문했다. 금강산을 관광특구로 지정해 이산가족 만남의 장으로 활용할 것을 북한에 제안했다. 그러면서도 북측 당국자들에게 “잘못된 점이 있을 때는 남이든 북이든 과감하게 비판하겠다”고 말했다. 회장님은 남북에 모두 당당했다. 민족의 화해와 협력, 평화 통일을 지지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하면서도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훼손하거나 국가 안보를 뒤흔드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히 대처했다. 이에 따라 동아일보는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권의 일방적 대북 유화정책에 대해선 날카로운 필봉을 휘둘렀다. 그러자 정권은 ‘언론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신문사와 대주주를 비방하면서 부도덕한 집단으로 몰아갔다. 동시에 “굴복하라”는 물밑 협박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지만 회장님은 “동아일보는 앞으로도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언론 본연의 역할을 다할 것을 믿는다”며 시련을 버텨냈다.

잘 알려졌듯 국악에 대한 회장님의 애정도 각별했다. 회장님은 완창 판소리 발표회, 창극 ‘아리랑’의 해외 공연 등을 지원했다. 그는 녹두장군 전봉준, 홍범도 장군, 윤봉길 의사가 창극으로 부활하는 데산파역을 맡기도 했다. 회장님은 평소 취기에 젖어들면 구슬프게 ‘흥타령’을 불렀다. “고나헤~ 성화로구나헤~ 아깝다 내 청춘, 언제 다시올거나, 철 따라 봄은 가고, 봄 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을 어이를할거나….”

2008년 2월 회장님 영결식장에서 안숙선 명창은 회장님을 추모하는 고별창을 해 식장을 숙연하게 했다. 안 명창이 “안 되지요, 안 되지요”라며 애끊는 목소리로 서러워하자 조문객들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기도 했다. 안 명창이 회장님에게 입은 은혜가 떠오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회장님이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그 허전함은 아직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 와서 누구에게 기대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요즘처럼 세상이 어수선할수록 회장님 생각이 더 난다.

요즘은 나라의 어른이 없는 세태 아닌가. 진영과 세대를 뛰어넘어 죽비 같은 한마디를 던질 어른이 없는 시대다. 한마디에 천근만근의 무게감이 느껴져야 할 텐데…. 회장님의 빈 공간이 더 커지는 이유다. 격동의 고비마다 기댈 수 있었던 회장님이 더욱 그리워진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