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최우석
최우석전 삼성경제연구소 부회장
신문사 생활을 오래했지만 막상 현역 시절엔 화정 김병관 회장님을 가까이서 뵐 기회가 별로 없었다. 동아일보사 행사에 참석해도 영국신사풍의 김상만 회장님이 주로 손님들을 맞았다. 화정 선생을 자주 뵌 것은 내가 신문사를 떠나 삼성경제연구소(SERI)에 있을 때였다. 그 땐 삼성 이건희 회장과 화정 선생이 사돈 관계여서인지 화정 선생께서 나를 좀 더 편하게 대해 주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김 회장님을 만나면서 한국의 신문과 동아일보를 한 번 더 돌아보게 되었다.

1960년대 초 첫 직장인 한국일보에 입사해 보니 ‘동아 타도’가 목표였다. 당시 한국일보는 창업 오너인 장기영 사장이 제작을 진두지휘했는데 선두인 동아일보를 곧 따라잡는다며 온갖 기발한 아이디어와 방법을 다 동원했다. 회사 곳곳에 ‘정상(頂上)이 보인다’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동아는 전통적인 경영 방식으로 유유히 앞서가고 있었다.동아는 발행 부수, 영향력, 신뢰도에 있어서 한참 앞서갔다. 대우도 좋았다. 그래서 꿈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기성 기자들도 많이 스카우트되어 갔다. 당시는 신문사가 많지 않아 서로 사정을 뻔히 알고있었기에 인사 교류도 잦았다.

그 무렵 김 회장님은 동아일보 광고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이것이 언론계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편집국에 비해 광고국은 을(乙)의입장이어서 고생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다. 왜 동아일보 오너의 장남이 그 힘든 광고국 근무를 하느냐는 것이었다. 오너 가족들은 편집국이나 기획실로 입사했다가 경영자로 올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나중에 김 회장님으로부터 광고국 있을 때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화정 선생은 “내가 어느 기업의 문제점을 알고 있는데 그게 기사화되지 않으면 편집국에 가서 항의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광고가 기사에 영향을 주어선 안 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삼성과 관련된 것도 많았는데 훗날 사돈 관계를 맺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국일보에 10년 정도 근무한 뒤 1970년대 초 중앙일보로 옮겼는데 거기서도 같은 석간인 동아에 대한 추격전이 치열했다. 창간한 지 얼마 안 된 중앙은 현대적 경영 판매 기법을 동원해 부수를 늘려 나갔다. 동아는 여전히 전통적인 경영 방식으로 선두를 지켰다.

당시는 중앙일보가 삼성의 계열사였고 이병철 삼성 회장님이 자주 중앙을 찾아와 간부들과 식사를 하곤 했다. 신문 판도는 조간에선 조선과 한국, 석간에선 동아와 중앙이 주로 경쟁을 벌였다. 식사 자리에서 판매 현황과 동아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동아의 실력자로 떠오른 김 회장님도 더러 화제에 올랐다.

1980년대 들어 조선이 약진하기 시작하면서 동아의 수위 자리를 위협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신문에 대한 경직된 규제가 풀리면서 석간인 중앙에서도 조간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그런데 회의를 해보면 각 부서에서 조간화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동아에서 결단을 하고 밀어붙이는 걸 보고 오너 경영인과 전문 경영인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했다. 중앙도 오너 경영인이 오고 나서야 조간화가 이루어졌다. 김 회장님을 다시 생각한 것은 동아의 조간 전환을 단행하고 안착시킨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중앙일보의 지배구조가 바뀌면서 언론계를 떠났다. 이어 1년간 일본 단기 유학을 마치고 삼성경제연구소장으로 돌아왔다. 그 후 닥친 환란(換亂) 태풍을 치르면서 기업도 언론도 지각변동이 일어나는 걸 보았다.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약진하면서 삼성경제연구소에서 컨설팅을 받으려는 수요도 늘어났다. 민간 기업은 물론이고 총리실, 감사원 같은 곳에서도 삼성의 시설을 빌려 연수 교육을 했다. 동아일보에서도 경기 용인 연수원에서 간부 교육을 했다. 그때 김 회장님이 직접 오셔서 교육 과정을 챙기고 간부들과 식사도 했다. 김 회장님을 안내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첫 말씀은 “내가 여기에 올 줄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었다. 젊은 시절 삼성 공격에 앞장서고 삼성 때문에 곤욕도 치렀는데 “삼성 연수원에서 간부 교육을 하다니….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라 하셨다.

그러면서 이병철 회장님의 묘소에 먼저 참배부터 하겠다고 하셨다. 마침 그날은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그래서 묘소 앞에 돗자리를 깔고 준비를 서둘렀다. 김 회장님은 정성스럽게 절을 올리곤 묘지 부근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김 회장님의 참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옛일이 떠올랐고, 저 세상에 계신 이병철 회장님은 어떤 심정일까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김 회장님은 꽤 긴 시간 동안 언론 상황과 동아의 장래에 대해 여러 구상을 밝히셨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이 회장님의 확고한 생각이었다. 뭔가 혁신하고 바꿔야겠는데 구체적 방법에 대해선 확신이 서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나에게 의견을 물으시기에 언론사 전반에 걸쳐 몇 가지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나도 막상 신문사를 떠나 밖에서 보니 우리나라 신문의 낙후점이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인사 시스템과 재교육 제도가 그랬다. 당시 기업들은 새로운 환경에 살아남기 위해 여러 변신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날 김 회장님은 편하게 말하고 편하게 들었다. 삼성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 부인과의 혼인 과정도 털어놓았다. 소탈하고 직선적인분이란 느낌을 받았다.

그 후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있는 김 회장님을 찾아 뵐 기회가 있었다. 그때도 여러 구상을 밝히면서 약 20년 뒤 다가올 창간 100주년때의 동아일보 위상에 대해 걱정하셨다. “어떻게든 혁신적으로 체질개선을 이뤄 1등 동아를 되찾아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셨다. 풍상을 많이 겪어 약간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신문에 대한 애착과 열정은 여전했다. “1등 동아.” “1동 동아.” 회장님의 우직한 목소리가 지금도 내 귓전에 어른거린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