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전만길
전만길전 동아일보 사회부장·전 대한매일신보 사장
내가 화정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하면 많은 동아일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네가 뭔데, 얼마나 화정을 잘 안다고.” 화정은 많은 사람을 만나려고 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화정은 나와 가장 가깝고 속을 털어놓을 정도다’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정열적이었고 마음에 품고 있는 걸 다 드러낼 정도로 솔직했다.

1968년 경방과 동아제약에서 근무하다 동아일보 총무국 차장으로 온 화정과 우연히 회사 근처 술집에서 자리를 함께했다. 수습 딱지를 갓 뗀 나를 보자마자 화정은 “전 선배”라고 했다. 입사가 나보다 늦었으니 내가 선배는 선배였다. 나보다 여덟 살이 많은 데다 오너의 아들이었지만 그런 생각을 전혀 갖지 못했다. 아주 편하게 사람을 대해 줬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동아일보도 정권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33명을 해고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회사는 33명이 밥이라도 먹게 하려고 기업과 연결시켜 줬다. 나는 가지 않았다. 그때 한번 화정이 나를 불러서는 “언젠가는 신문사에 와서 일을 할 텐데 신문에 광고라는 게 무지하게 중요하다. 광고국에 가서 광고를 배워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렇게 2년을 버티다 한국자동차보험 홍보실장으로 갔다. 이후 2년이 지난 1984년 5월 당시 남시욱 출판국장에게서 “입사할 수 있겠느냐”는 전화가 왔다. “33명 전원이 같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건 아니었다. 나와 같이 사회부에 있다 해직된 최맹호, 배인준만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박권상, 최일남 선생께 여쭙고 같이 해직된 선후배 동료들과 논의한 끝에 복직을 결심했다. 1984년 6월 1일자로 우리 셋은 복직했다. 나는 출판국 기자였다. 언론에서 국(局)기자 1호였을 것이다. 여전히 엄혹하던 시절 해직 기자를 복직시킨 것은 동아일보가 처음이었다. 사실상 화정에게서 나온 생각이었다.

복직하고 받은 첫 월급을 아내에게 봉투째 가져다주고 거기서 5만 원을 받았다. 화정과 이상하 부장을 ‘재령집’에 모셨다. 무릎을 꿇고 이야기했다. “인촌 선생의 정신으로 인해 전국의 인재들이 줄을 이어 오늘날 동아일보가 있게끔 됐습니다. 권력과의 관계에서 피치 못하게 해직을 시킬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도 언젠가는 들어와야 하지않겠습니까. 그런 노력을 계속해 주십시오.” 주제넘게 들릴 수 있는 말이었지만 화정은 개의치 않고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사실 화정은 동아투위 쪽과도 많이 접촉했다.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했다. 내가 알기로 동아투위 사람들도 인간적으로 화정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내가 동아일보를 떠난 후에도 화정을 뵐 일이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런저런 나의 생각을 말씀드리곤 했다. 나는 까칠하다 할 정도로 저항심이랄까 그런 것이 있었다. 그런 나를 화정은 좋게 봤다. 그는 자기 앞에서 거침없이 눈치 안 보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화정이 발행인이던 시절 동아일보 노조가 최초의 파업 결의를 했다. 사측 임원회의에서는 “파업은 인정할 수 없으며 노조에 대해 강경대응하겠다”는 사고(社告)를 내기로 결정했다. 사고가 신문에 실리면 노조는 파업에 돌입하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날 화정과 노조 간부들이 점심을 먹는 자리에 나도 같이했다. 나는 “문제를 해결하려면 접점이 있어야 하는데 평행선만 달리면 서로 상처만 입는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화정이 “해결책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무엇보다 임원회의에서 결정한 사고가 신문에 실리기 전에 빼야 한다”고 말했다. 노조위원장도 그렇게 하면 자신들도 고려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 석간 시절이라 이미 강판해서 윤전기는 막 돌아가기 시작한 때였다. 화정은 당시 장행훈 편집국장에게 “사고를 빼라”고 전화를 걸었다. 장 국장은 “임원회의에서 결정한 사항을 어떻게 사장 말 한마디로 바꿀 수 있느냐.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옥신각신하다 장 국장은 “발행인 대표이사 명의로 말하면 빼줄 수 있다. 그 말을 해달라”고 했다. 화정은 일시도 지체하지 않고 말했다. “동아일보 대표이사 발행인 김병관이 편집국에 명한다. 사고를 빼라.” 어떤 면에서 화정은 개성 있는 사람들이 동아일보에 몸담고 한국언론에서 나름대로 기여할 수 있는 자양분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

화정은 소통의 달인이었다. 역대 우리나라 신문사 오너 가운데 그분처럼 그야말로 모든 기자와 말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다 보면 상하보다 수평 관계처럼 느껴졌다. 한번 만난 기자는 누구든 이름을 기억하고 관련된 에피소드를 얘기한다. 기자는 ‘우리 오너가 나를 이토록 중요하게 여기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얼마나 좋았겠는가. 동시에 자신이 세상 이야기를 듣는 라인을 다변화시키며 점검하기도 했다.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종합해서 큰 그림을 그려 갔다.

화정은 동아일보에 대해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동아일보다운 동아일보를 만들겠다’였다. 인촌이나 고하 같은 민족 지도자들이 ‘민족 민주 문화’를 사시로 해서 이끌던 때의 동아일보를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둘째는 ‘질적인 것 못지않게 양적으로도 최고 최대의 신문으로 키우겠다’는 것이었다. 우리 때나 이후에도 동아일보의 영향력은 말도 못할 정도였다. 기자 대우도 언론사에서 으뜸이었다. 그러나 경쟁지를 자처하던 언론사가 국가의 일본 차관을 이용해 호텔을 만들어 사재를 키우고 영향력을 키웠다. 화정으로서는 용납이 되지 않았다. 셋째는 ‘경영 체제를 튼튼히 하겠다’였다. 화정의 이후 삶은 모두 이 세 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기인이기도 했다. 안경희 여사께서 돌아가셨을 때다. 다음 날 오전이 발인인데 내 선친 기일이 그 전날 밤이었다. 피치못해 전날 오전에 빈소를 찾았다. 사정을 설명했더니 화정이 불쑥 “전사장, 당신 조의금 가져왔어? 내놔 봐”라고 말했다. 대한매일 사장이던 때이기도 해서 내 나름대로 부의를 두둑하게 준비했다.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드렸더니 열어서 슬쩍 본 화정이 말했다. “헌 돈 가져왔네? 이거 돈세탁하려고 그런 거야?” 그러면서 다시 봉투를 내 안주머니에 넣어주셨다. “풋”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엉뚱하면서 아이 같기도 했다. 노완동(老玩童)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화정이 분노가 폭발할 때는 말도 못할 정도였다. 젊은 기자에게는 항상 너그러웠지만 나이 든 임원들을 닦아세울 때는 서릿발 같았다. 화정은 당당하지 못한 모습을 거듭 보이는 사람을 싫어했다. 사람 보는 눈이 있었다. 웃어른으로서 존경하고 깍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게 봤지만 그 속에 사심과 자기 이익을 담는 사람은 좋아하지 않았다. 묻는 말에 대해서도 공정하고 당당하게 큰 차원에서 얘기해야지 자기 공부터 내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일단 낮게 봤다. 동아일보 언론인이라는 사회적 명망을 가지고 폼을 잡거나 동아일보를 최대한 ‘팔아서’ 스스로의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이중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한 증오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부감이나 멸시하는 태도는 분명했다.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해도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그때는 넘어갔지만 집요한 면도 있었다. 어떤 형태로든지 다시 한번 자신의 뜻을 내보였고 그걸 또 거부하면 나름의 불이익을 줬다. 나는 큰사랑을 받았지만 이런 의미에서 화정의 뜻에 완전히 부응하지는 못했다. 변명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화정에게 더 가까이 가면 내 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그 열에 내가 없어질 것 같았다.

생전에 많이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했다. 많이 도와달라고 하셨을 때 나름대로 한다고 했지만 화정 뜻대로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받은 만큼 한 번도 되돌려 드리지 못했다. 말은 안 했지만 내가 얼마만큼 존경하고 사랑했는지 화정은 아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다짐한 것이 하나 있다. 인촌, 일민, 화정 이 세 분의 행사에는 반드시 참석한다는 것이다. 화정, 당신이 생각하신 것보다 많이 존경했고 사랑했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