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채주
이채주전 동아일보 주필·전 화정평화재단 이사장
1985년 12월.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짓눌렸던 또 한 해가 저물던 어느 날 화정 선생이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나를 술자리로 부르셨다. 힘들고 고단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는 송년 모임이어서 술잔도 제법 많이 돌았다. 그 자리에서 화정 선생이 “올해는 이 국장 당신의 해야”라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군사정권에 성난 민심이 봇물처럼 표출됐던 그해 2·12총선 보도를 비롯해 동아일보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그 때문에 큰 고초를 겪은 것을 언급하시며 신문제작 책임자인 편집국장을 그렇게 격려하신 것이다.

전두환 정권 시절 동아일보는 언론탄압의 주된 표적이었다. 특히1985년엔 나와 이상하 편집국 부국장 대우 정치부장, 김충식 정치부기자가 8월 30일 남산 국가안전기획부 지하실로 끌려가 9월 1일까지온갖 협박과 고문을 당하고 무차별로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제5공화국 시절 무소불위(無所不爲)였던 안기부가 우리를 강제 연행한 것은 동아일보 8월 29일자 2판에 실린 ‘중공기(中共機) 조종사 대만(臺灣) 보내기로’ 기사가 엠바고(보도시간 제한)를 위반했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는 핑계일 뿐 실제로는 정권에 비판적인 동아일보에 재갈을물리고 민주화의 싹을 자르려는 겁박이었다.

2박 3일 만에 온몸에 멍이 든 채 풀려났을 때 화정은 “동아일보를 대신해서 고초와 가혹행위를 당한 것으로 생각해 달라”고 위로하셨다. 필자는 끌려가서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지만 동아일보의 최고경영인인 화정은 정신적인 고통을 더 많이 받으셨다. 전두환 정권의 무도한 탄압이 얼마나 심했으면 심지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도 생명에 위협을 받았다”고 하신 적도 있다. 그렇게 엄혹한 상황에서도 화정은 편집국장에게 “신문은 당신이 책임지고 만드시오” 하고 전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나는 화정이 동아일보 대표이사로 취임한 해인 1983년 5월 1일부터 1986년 12월 31일까지 만 3년 8개월간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 기간 중공 민항기 춘천 불시착, 소련 미사일의 KAL기 격추, 미얀마 아웅산 묘소 테러, 운동권 학생들의 미국문화원 점거 등 굵직한 사건들이 쏟아졌다. 편집국장으로서 이런 대형 사건과 이슈에 관해 보고를 드리면 화정은 듣기만 하실 뿐 구체적으로 ‘이리해라 저리해라’ 하지 않으셨다. 믿고 맡기는 화정의 스타일은 필자가 주필이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설과 칼럼의 논조, 필자 선정, 내용 등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늘 “신문 제작 때 경영진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당부를 하셨고 그런 신문 경영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당시 동아일보는 부동의 ‘1등 신문’이었지만 화정은 결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다. 대표이사가 된 뒤 ‘제2의 창간’을 부르짖었다. 지면을 일신해 더 좋은 신문을 만들자는 뜻이었다. 동아일보가 항상 정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신념이었고 모두가 심기일전해 신문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화정이 가장 관심을 둔 것이 정치 부문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였다. 불의한 권력이 동아일보를 무자비하게 옥죄던 그 시절 ‘제2의 창간’을 주창해 신문을 활성화한 것이 화정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화정에겐 동아일보를 최고의 신문으로 만드는 것과 더불어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강제로 빼앗긴 동아방송을 되찾는 것이 필생의 염원이었다. 절치부심하는 부단한 노력에도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셨지만 만일 지금 살아서 채널A 방송이2011년 개국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무척 뿌듯해 하실 것 같다.

화정은 공식석상에선 별 말씀을 안 하시지만 약주를 드시면 세상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편안하게 하셨다. 술자리에서도평소 성정처럼 점잖으셨다. 회식할 때는 폭탄주를 드셨지만 둘이 마실 때는 시바스 리갈을 스트레이트로 드시는 것을 즐기셨다. 얼큰하게 마신 뒤에는 꼭 기사가 딸린 승용차로 우리 집 앞에 나를 내려 주고 귀가하셨다. 참 인간적으로 자상하고 소탈하신 분이었다. 골프를 칠 때도 승부에 집착하기보다는 운동 삼아 했고 함께 라운드하는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몸에 배어 있었다.

화정은 국악을 좋아했고 국악인들과도 가깝게 지냈다. 국악을 즐기셨던 인촌 선생 등 선대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문화 쪽에 관심이 많아 해외에 나가면 유적과 박물관 등을 찾아다녔다. 궁금한 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꼭 물어서 설명을 들었다.

남북문제에도 화정은 각별히 관심이 많았다. 2000년 4월 21세기평화재단(2006년 화정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설립한 것도 남북간의 긴장 완화와 이질감 해소, 화해를 위한 것이었다. 화정은 낙관론자여서 1998년 대한민국 신문 발행인으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고 온 뒤 남북 관계가 순조롭게 풀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국 북한 때문에 남북 관계가 풀리지 않는 것을 많이 안타까워했다. 화정이 10억원, 동아일보사가 10억 원을 각각 출연한 화정평화재단도 당초엔 세계적인 연구기관으로 키우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계셨으나 남북 관계가 좋지 않게 전개되고 외환위기로 출자가 어려워지면서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동아일보사에서 화정이 보낸 세월은 고뇌의 연속이었다. 화정이판매국에서 근무할 때 벌어진 박정희 정권의 ‘동아일보 광고 탄압’ 때도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다. 김대중 정권의 언론사 세무조사도 큰 시련이었다. 그렇게 어려울 때 찾아뵙고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 화정은 묵묵히 듣기만 하셨다. 나는 화정이 화를 내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나는 화정이 경성방직에서 일하던 1960년대에 그분을 처음 만났다. 내가 출입하던 상공부에 회사 일로 찾아오셔서 잠깐 인사를 나눴다. 그 후 화정이 1968년 동아일보 총무국 관리부 차장으로 입사해2008년 2월 돌아가실 때까지 오랜 세월을 함께했지만 공선사후(公先私後)를 실천하는 그분의 모습은 젊은 시절부터 평생 한결같았다. 명가의 후손은 역시 품격이 다르다는 것을 공사(公私) 간에 많이 느꼈다.

어느덧 돌아가신 지 10년. 지금도 동아일보사는 잘하고 있지만 화정이 일찍 돌아가신 것이 참 아쉽다. 사람의 선의를 믿고 크게 베풀었던 신사(紳士) 화정. 그분의 넉넉함이 이리 그리운 것이 어찌 나만의 회억이겠는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