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현진해
현진해전 고려대 의료원장
교수로 의사로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기념패와 감사패를 많이 받았으나 내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화정 김병관 전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이 내게 전해준 감사패이다. 대학에서 정년퇴직하고 개인병원을 운영하는 지금도 진료실 책상 옆에 이 감사패가항상 든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감사패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현진해
귀하는 고려대학교 의무부총장 및 의료원장으로 재직하면서개인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열과 성을 다하여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발전과 의료원의 내실 있는 경영에 크게 공헌하였으므로 이에 고마움의 뜻을 담아 감사패를 드립니다.
2005년 6월 9일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 이사장 김병관

이 감사패가 특별한 이유는 화정의 속 깊은 정과 배려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려대의료원장(1999~2001년) 보직을 떠나서 교수로 일하던 시절의 일이다. 화정은 나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한마디 툭 던졌다. “현 선생, 자네 수고했는데 감사패가 있어야겠어.” 나는 지나가는 말이겠지 하고 무심코 흘려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점심을 먹자고 부르시더니 둘이 밥 먹는 자리에서 이 감사패를 내게 주시는 게 아닌가. 의료원장으로 일할 때 내가 애쓴 것을 평가해 주고 싶어 했던 그분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가 느껴졌다.

화정은 고려대의료원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 지대한 관심을 쏟고 이사장으로서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의료원장으로 일하는 동안 나는 직원들의 월급 체계 개선과 낙후된 컴퓨터 등 병원 시설 개선 등을 중점 과제로 추진하고자 했다. 그때 내게 힘을 실어 주신 분이 화정이었다. 개혁은 변화를 뜻한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마다 화정 선생이 많이 도와주셨다. 대통령 직무를 잘하려면 소속 정당의 뒷받침이 필요하듯이 의료 행정도 이사장이 힘을 실어 줘야 박차를 가할 수 있다.

내가 알던 화정은 무슨 일을 해도 강압적인 방법보다 자율성을 존중했다. 의료원장을 맡았을 때 한번은 골프를 치러 가자고 부르셨다. 라운드를 하면서 물으셨다. “현 선생 생각에는 어떻게 해야 의료원이 잘될 것 같은가?” 그래서 이것저것 개혁이 필요하지만 기본적 진단을 위해 컨설팅부터 필요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그래 돈은 얼마나 드는데?”라는 질문에 대답을 했더니 그 자리에서 “그럼 한번 해볼까”라고 과감히 결단을 내리셨다.

얼마 뒤 화정은 나를 불러 “재단에서 돈 주면 당신이 책임질 수 있겠나?”라면서 개혁에 대한 의지와 각오를 재차 확인하셨다. 그 말에 “일을 시키려면 전권을 함께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자네가 알아서 하게”라며 믿고 맡겨 주셨다. 그때 이사장의 도움으로 나는 용기백배하여 개혁 작업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화정 덕분에 컴퓨터도 바꾸고 의사들의 특진 제도와 인센티브를 도입하는 등 병원 발전을 위한 개혁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당시 개혁의 밑그림을 그리기 위해 직원들이 사용할 공간이 필요했다. 마침구로병원 옆에 일민 김상만 선생이 사용하던 자그마한 공간이 있었다. 내가 화정을 찾아가 그 방을 주시면 안 되겠냐고 물었더니 “우리 아버지가 쓰시던 방인데…” 하면서 난감한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 고민 끝에 허락해 주셨다. 그 방에 있던 가구 중 일민 선생이 쓰셨던 안락의자를 ‘제게 주십사’ 청을 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해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나와 화정은 보통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화정을 직접 만나기전부터 숙부(현승종 전 국무총리)를 통해 인촌 김성수 선생 집안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일민 선생이 고려중앙학원 이사장을 맡았던 시절부터 주치의로 댁에 드나들면서 건강을 챙겨드렸기에 자연스럽게 화정과도 안면이 있었다. 일민 선생님 부부와 화정의 부인이 마지막 가는 길도 내가 직접 챙겨 드렸다. 오랜 시간 일민과 화정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뼈대 있는 집안은 역시 다르구나 하고 감탄한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두 분은 명문가 자손답게 지킬 것은 지켰고 조상에 대한 예의가 매우 각별했다.

사모님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화정을 지켜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주검으로 돌아온 부인의 차디찬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비비면서 애통한 슬픔을 감추지 못하셨다. “내가 잘해 준 것도 없는데”라고 했던 울음 섞인 화정의 목소리가 기억에 생생하다. 겉보기에는 덤덤한 성격으로 보일지 몰라도 화정 부부의 남다르게 깊은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화정은 좋고 나쁜 것의 표현이 분명했다. 화정이란 호를 받았을때 “나, 호 생겼어”라면서 어린아이처럼 자랑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평소 화정은 술을 좋아하고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약주를 드셨지만 일에 있어서는 빈틈없이 철두철미했다. 나는 화정과 술 먹을 기회가생기면 조심스러웠다.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얘기나 행동거지를 다 기억하는 분이었기 때문이다.

한번 뭘 하겠다고 결심하면 화정은 무쇠처럼 밀어붙였다. 일하는 방식도 뭐 하나 대충 하는 법이 없었다. 거침없이 밀어붙이면서도 사뭇 치밀했다. 그냥 툭 던진 말 같아도 사전에 알아볼 것은 다 알아보고 말을 꺼내는 스타일이었다. 이사장으로서 학교 일이라면 크든 작든 두 팔을 걷어붙이고 앞장섰다. 한번은 모 총장이 화정 이사장에게 의논도 안 하고 학교 운영과 관련한 일을 독단적으로 추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총장의 계획대로 일이 잘 진행되지 않고 지지부진하자 화정은 개인적 감정을 뒤로하고 본인이 나서서 해결해 주는 대인의 풍모를 보였다.

말도 못 붙일 만큼 화정을 무섭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무서운 것을 잘 몰랐다. 어느 때는 “자네는 우리 집 식구니까”라고 하시면서 동생처럼 허물없이 대해 주셨다. 조금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일이 있으면 자연스럽게 “현 선생, 골프 치러 갈까” “우리 저녁 한번 같이 먹지”라고 따스하게 말을 건네던 그분의 모습이 여전히 그립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