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이연택
이연택전 총무처 장관·동아마라톤꿈나무재단 이사장
화정 선생과의 인연은 고향인 전북 고창에서 시작됐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화정 선생 일가가 공습을 피해 고창으로 왔다. 당시 화정 선생은 내가 다니고 있던 소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 6학년으로 편입했다. 나는 3학년이었다. 당시에도 서로를 알았지만 직접 교류는 별로 없었다. 막역하게 친해진 것은 광복 이후다. 서울에서 만난 후 꾸준히 만나 고향 이야기도 하고, 가까운 고향 사람들끼리 모여 회포를 풀며 인연을 이어 갔다.

전해 들은 얘기로 화정 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강직했다. 청소년기에는 직접 교류하지 않아 대부분의 이야기는 성인이 된 후 전해 들었다. 일제강점기 막바지 고창에는 유학파 사회주의자, 민족자본가, 대지주 등이 골고루 있었다. 그 때문에 정치적 이념적 갈등이 적지 않았다. 일부 사회주의자 진영에서는 화정 선생을 해코지하려고도 했었다. 그래도 화정 선생이 원만하게 잘 풀었다. 나중에는 사회주의자 진영에서도 화정 선생이 화끈하다고 했다고 한다. 화정 선생은 대체로 대인 관계가 원만했고 포용력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갈등을 잘 극복한 게 아니겠는가.

화정 선생과 가깝게 지내게 된 계기는 고창 인촌 생가의 진입도로 포장에 내가 약간의 도움을 준 게 알려지면서다. 당시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고, 열악한 곳부터 하나씩 정비하고 있었다. 인촌 생가 진입로 포장도 그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한 것이다. 그게 계기가 돼 화정 선생과 더 깊게 인연을 쌓기 시작했다. 내가 총무처와 노동부 장관을 했고 화정 선생이 언론사 사주였지만 우린 서로 특별히 도움을 주거나 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고창이 매개가 돼 인연이 이어졌을 뿐이다. 그저 인간적으로 형님 동생 하며 친하게 지냈다.

직접 만나면서 느낀 화정 선생은 원칙과 명분을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다. 말을 할 때도 언뜻 들으면 대충 하는 것 같지만 뜻이 숨어있을 때가 많다. 평소 화정 선생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다. 다만 친한 사이에는 속을 털어놓기도 한다. 그럴 때는 술을 마시면서 정치 상황에 대해 격정적으로 비판을 토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타협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늘 정도(正道)를 걸으려 했고, 사사로운 이해관계를 멀리했던 것 같다. 동아일보 설립자인 인촌 선생의 공선사후 정신을 늘 실천했다. 공적인 영역에서는 더욱 원칙을 지켰고 좀처럼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다. 그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을 수첩에 적어봤는데, 바로 ‘비타협’과 ‘불굴’이다. 그분은 손해를 보더라도 끝까지 원칙을 지켰다. 그런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때마다 ‘저렇게 하기에는 쉽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했었다. 언론사 사주로서 그만큼 대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게 동아일보의 역사와 전통이자 DNA가 아닌가 싶다.

사람을 사귈 때도 원칙과 명분을 중요하게 여겼다. 만약 상대방이원칙과 명분을 어기면 관계를 끊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아주 오래 만난 정치 거물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상대방이 원칙을 지키지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고 타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화정 선생은 자기 관리가 엄격했고 기억력이 비상한 분이었다. 대충 말을 하는 것 같아도 숨겨진 뜻이 다 있었다. 화정 선생은 평소에도 대화를 할 때 과거의 일을 날짜는 물론이고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 중에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분을 본 적이 없을 정도다.

기억력과 관련해선 잊지 못할 게 많이 있다. 함께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취하도록 마셨는데 그날 있었던 것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셨다. 옆에서 지켜보다 보면 걱정스럽고 ‘내일이면 기억하지 못 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실 때도 있다. 그런데도 다음 날이 되면 모든 것을 세세한 부분까지 다 기억해 낸다. 대단히 무서운 분이라고 생각하며 저분 앞에서는 술 마셔도 실수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화정 선생은 민족의식도 투철했다. 1990년 화정 선생이 중앙아시아에 간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연해주에서 살다 중앙아시아로 쫓겨난 동포(고려인)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당시 화정 선생은 우리민족의 한(恨)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화정 선생은 사비를 들여 창극단을 이끌고 중앙아시아와 모스크바 등을 돌며 순회공연을 가졌다. 단지 전통문화에 조예가 깊은 인물인 줄로만 알았는데,그때 화정 선생이 우리 민족의식과 민족문화에 그토록 애정이 깊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1998년에는 일민미술관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가 도예전을 ‘400년 만의 귀향’이란 제목으로 열기도 했다. 그때 화정 선생과 함께 일본 현지에 가서 심수관의 집을 미리 방문했었다. 화정 선생은 민족애를 고취시키는 데 상당히 애를 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

화정 선생은 스포츠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주역 중 한 명이다. 특히 마라톤에 관심이 많았다. 1992년 황영조가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후에 화정 선생은 손기정, 황영조로 그치지 않고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의 맥을 잇기를 바랐다. 그때 논의된 것이 꿈나무를 키우자는 것이었고, 1993년 동아마라톤 꿈나무재단을 설립했다. 그 후 제주도에 마라톤 훈련센터도 만들었다. 화정 선생은 마라톤을 비롯해 스포츠를 발전시키는 것이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고려대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2005년 고려대가 100주년을 맞아 대대적인 도약에 성공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중앙광장, 100주년 기념관, 화정체육관을 완공했다. 사실 이 모든 게 화정 선생의 업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정 선생이 두꺼비처럼 묵묵하게 백방으로 뛰어다녔던 것을 똑똑하게 기억한다. 화정 선생은 사업가로서도 탁월했다. 화정 선생이 경영 감각이 없었다면 그런 큰 사업을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공직을 떠난 후로는 화정 선생과 부부 동반으로 자주 여행을 갔다. 가끔 함께 골프도 즐겼다. 그럴 때면 화정 선생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형제처럼 인간적으로 깊은 신뢰를 가지고 많은 대화를 나눴다. 때로는 신세타령도 하고, 집안 이야기도 하고….

화정 선생은 참 외로웠던 분이다. 평생을 원칙주의자로, 민족주의자로 살면서도 어디 가서 속을 풀 수가 없었을 것이다. 화정 선생은 인촌 선생의 정신과 원칙을 분명하게 이어받아 실천했다. 그게 동아일보의 맥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