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정진석
정진석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1920년 창간 이래 동아일보는 한국 근현대사의 숱한 시련을 극복하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발전을 이끌어 왔다. 화정 김병관(化汀 金炳琯) 선생은 동아일보를 창간한 인촌 김성수 선생의 장손으로, 1968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2008년 타계할 때까지 동아일보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했다.

화정 선생이 동아일보에서 일했던 시기는 그야말로 정치적 격동기였다. 그렇기에 한국 언론의 시련은 적지 않았고 역설적으로 동아일보의 역할과 위상은 더욱 빛을 발했다. 또한 이 시기는 동아일보 등 한국의 신문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던 때였다. 그 한복판에 화정 선생이 있었다.

화정 김병관 선생이 평생을 바치게 될 동아일보에 입사했던 1968년은 권력의 언론탄압이 나날이 강화되던 무렵이었다. 주된 표적은국내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신문 동아일보였다. 화정 선생이 입사한 바로 그해에 ‘신동아 필화 사건’이 일어났다. 신동아 11월호 기사 ‘차관(借款)’(김진배, 박창래 공동 집필)을 문제 삼아 중앙정보부는 집필자 두 기자와 발행인(김상만), 주필(천관우), 신동아 주간(홍승면), 신동아 부장(손세일) 등의 간부진을 연행하거나 구속 신문했다.

야당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의를 벌이면서 정부의 언론탄압을 규탄했고, 편집인협회와 기자협회는 당국의 처사에 항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언론계와 정계에서 뜨거운 논란이 있었으나, 살아 있는 권력을 이길 힘은 없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후일의 역사적 심판을 비유한 경구(警句)에 지나지 않았다. 현실 세계 권력의 힘은 언론보다 강했다. 동아일보는 권력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여 관련 간부진의 전면적인 인사 개편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천관우, 홍승면, 손세일 3명의 해임 조치였다. 이는 언론이 권력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행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동아일보만이 아니라 전체 언론이 새로운 시련기에 접어들었다는 엄중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1970년대 신문의 외형상 특징은 양적인 성장이었고, 가시적인 현상은 증면(增面)이었다. 정부의 통제로 인해서 1960년대에 주 36면에 묶여 있던 지면이 1970년 3월부터 48면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성장의 이면에 언론 자유는 위축되고 관권의 노골적인 개입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에 반발하여 기자들은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1969년의 3선 개헌과 1972년의 유신헌법 공포 등으로 정치적으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던 때에 학생들과 야당권은 언론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다. 언론계 내부에서는 젊은 기자들이 기성 간부 언론인과 경영진에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1971년 5월 27일로 예정된 대통령선거와 6월의 제8대 국회의원 총선을 앞둔 3월 23일 서울대 학생들은 동아일보사 앞에서 언론 규탄 데모를 벌였다. ‘민중의 소리 외면한 죄 무엇으로 갚을 텐가’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언론에 대한 경고장’을 배포했다. 젊은 기자들이 집단으로 나서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을 벌이던 배경에는 이 같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동아일보는 전체 언론을 대표하여 권력과 독자 양측의 압박을 동시에 받는 입장이었다. 권력은 순응과 협조를 강요했고, 독자들은 투쟁을 요구했다.

1971년 4월 15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채택한 ‘언론자유선언문’을 시발로 언론 자유 수호 운동은 전국 각 언론기관에 확산되었다. 비슷한 결의문 채택이 뒤를 이었다. 선언문 가운데는 기관원들이 언론기관에 상주(常住)하다시피 수시로 드나들면서 간여하는 행태를 거부한다는 내용이 핵심 요소였다. 동아일보는 편집국 출입문에 ‘기관원 출입금지’를 써 붙였고, 이 내용은 각 사 선언문에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언론 본연의 사명인 진실 보도 기능을 거세당했다면서 신문방송의 제작과 판매의 모든 과정은 언론인의 양식에 따라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언론 자유 수호를 다짐하면서 외부 세력의 간여를 거부하는 일선기자들의 움직임은 전국 언론사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언론이 사명 을 다하지 못하는 원인은 외부에 있지만, 그러나 언론계 내부의 문제도 있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자성했다.

때를 같이하여 언론계를 비롯한 학계, 법조계, 종교계 등의 저명인사들도 민주 수호를 선언하는 모임을 가졌다. 1970년대에 움직임이 활발했던 ‘재야인사’들이 조직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모임에는 천관우(동아일보 이사), 양호민(조선일보 논설위원), 장용(한양대 교수·신문학) 등이 참여했다.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기자들은 노조를 결성하여(1974년 3월 7일) 경영진과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 와중에 유신정권은 ‘광고 탄압’으로 동아일보의 숨통을 틀어쥐려 했다. 동아일보 광고 탄압은 동아, 조선, 한국의 3대 일간지가 기자와 경영진의 갈등으로 긴장감이 감돌던 1974년 12월 16일 무렵에 시작되었다. 일선 기자들이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실천 운동을 전개하면서 기관원들의 언론사 출입을 금지하던 시기다. 광고 해약 사태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DBS), 신동아, 여성동아에 막대한 수입 손실의 타격을 입힌 뒤, 7개월 만인 1975년 7월 16일 무렵부터 정상화되었다. 이 기간에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줄을 이었고, 발행 부수도 증가했다. 하지만 동아가입은 가장 큰 타격은 이 사태의 와중에 해직당한 기자들로 인한 인적손실이었고, 그들과의 메울 수 없는 깊은 갈등이었다.

언론 사상 초유의 사태를 맞은 시기에 화정 선생은 선대인 김상만사장을 보필하면서 신문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를 지켜보았고, 언론사 최고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자질을 닦고 있었다. 선생은1983년에 동아일보 전무로 승진했고, 대표이사 부사장(1985년) 을 맡았다가 1987년에는 발행인이 되었다.

발행인을 맡은 그해 동아일보는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보도하여 전국적인 민주화 운동의 불씨를 지폈다. 언론사에 기록될 큰 사건이었다. 1989년에는 사장에 취임하여 동아의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1994년 김상만 회장 타계 이후에 화정 선생은 동아일보의모든 책임을 한 어깨에 짊어지는 위치에 서야 했다. 동아일보는 3대를 이어온 영광스러운 가업(家業)인 동시에 벗어 던질 수 없는 무거운 십자가였다. 창업주 인촌 김성수 선생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식민지 시대에 출발하여 격동의 역사를 헤쳐 온 전통의 신문 운영을 책임지는 중압감에서 잠시라도 피할 수 없는 몸이었다.

화정 선생이 최고경영자가 된 이후에 언론 환경은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신문사 경영이 어렵지 않은 때가 없었지만 선생은 새로운 시련과 도전을 극복해야 할 과제를 떠안게 되었다.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은 폐쇄되었고, 인쇄매체의 성장이 둔화되는 추세였으며 언론사 내부의 노사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90년에는 한국신문협회 회장에 선출되어 전체 신문업계의 권익을 신장하고 언론 자유를 수호할 임무를 맡아 헌신했다.

화정 선생은 시대의 추세와 언론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여 지면 제작의 관행도 과감하게 혁신했다. 동아일보는 1993년 4월 석간에서 조간으로 전환했고, 1998년 1월 1일부터 전면 가로쓰기를 단행했다. 동아는 이전부터 부분적인 가로쓰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스포츠, 방송연예, 문화, 생활, 과학면 등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가로쓰기 제작을 실시하였고, 1996년 5월 1일부터는 사설과 국제면, 경제면도 세로쓰기의 오랜 틀을 깨기 시작했다. 조간 전환과 가로쓰기는 동아일보 단독 혁신은 아니었다. 시대의 추세를 반영한 변화였지만 화정 선생이 이끌던 시기에 기존의 전통을 깨는 혁신 작업을 단행하였다는 사실은 평가할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가로쓰기는 특히 젊은 한글세대 독자들을 위한 배려였다. 스포츠, 방송연예, 문화 등 젊은 독자가 선호하는 지면을 먼저 가로쓰기로 제작하면서 점진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권력의 언론 탄압은 민주화 이후에 더욱 교묘하고 지능적으로 진화(進化)했다. 김대중 정권은 2001년에 동아일보를 비롯한 특정 언론사를 표적으로 삼아 세무조사를 실시했다. 이해 국세청은 2월 8일부터 23개 중앙 언론사 세무조사를 일제히 시작한다고 발표했는데, 주된 표적은 메이저 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였다. 국세청의 세무조사에 때를 맞추어 공정거래위원회는 불공정거래 조사에 나섰고 언론사 및 사주 고발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언론 역사 초유의 광풍이 몰아쳤다.

동아일보는 827억 원의 세금 추징을 통고 받았고, 김병관 명예회장,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국민일보 조희준 넥스트미디어 회장 등 신문사 사주(社主) 3명은 대표이사로서의 책임과 별도로 증여세, 소득세 탈루 등에 따른 개인 고발이 추가됐다. 국세청이 발표한 6개사의 전체 세금은 개인, 계열사 부분을 합쳐 6335억 원에 추징세액은 3048억 원이었다.

화정 선생은 구속되어 2002년 2월 1심 재판에서 징역 3년 6개월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부인의 희생이 따르는 커다란 비극을 겪었다. 세무조사와 함께 검찰의 수사를 받는 고통과 수모를 당하던 7월에는 부인 안경희 여사가 목숨을 끊어야 했을 정도로 탄압의 강도가 거세었다.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참기 어려운 희생을 치르고 탄압을 겪어야 하는 사태가 민주화가 된 21세기에 화정 김병관 회장에게 닥쳤던 것이다. 권력의 편에 서서 탄압받는 신문을 매도하는 언론도 있었다. 언론계의 분열은 권력을 향한 저항을 약화시켰다. 그런 가운데도 화정 선생은 경영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언론 자유의 수호를 위해 타협을 거부했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7년에 화정 선생은 두 번째로 광고를 이용한 권력의 압박을 받았다. 일부 정부 부처와 공기업이 신문광고를 하면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문화일보를 배제한 것이다. 세 신문에 대한 광고 배제는 문화관광부 산하 한국관광공사가 테이프를 끊었고, 다른 공기업으로 번져 갔다. 국정홍보처는 ‘e-PR 시스템’이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공기업의 광고 집행 현황을 실시간으로 감시했다.

화정 선생의 업적을 모두 나열하기는 어렵다. 교육 사업으로는 고려대 이사장을 맡아 학교 발전의 기틀을 다지기도 했다. 청계천의 물길이 시작되는 세종로에 우뚝 선 동아미디어센터(1997년 기공, 2000년 완공)는 선생의 업적을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동아일보 사옥의 기능 외에도 미디어의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합하고 21세기 정보 커뮤니케이션의 바람직한 앞날을 열어갈 중심 공간을 지향하는 건물이다. 2000년에 개관한 국내 최초 동아일보 신문박물관(Presseum)도 언론의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정신을 담은 사업이었다. 한때는 저녁 시간이면 동아미디어센터는 서울에서 발행되는 여러 신문 보급소의 집합 장소로 개방되기도 했다. 신문의 초판이 가장 먼저 모이는 장마당을 화정 선생이 펼쳐 놓았던 것이다. 화정 김병관 선생은 동아일보의 전통과 명예를 지킨 경영인이자 언론의 자유를 신장하면서 신문을 통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