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신영희
신영희국악인
화정 김병관 선생은 평생 국악을 즐기고 사랑하셨다. 또한 명인명창무대, 판소리 유파 발표회, 동아국악콩쿠르, 창극 공연까지 대한민국의 국악인들이 현대적 극장 무대에서 당당히 설 수 있도록 수많은 기회를 주신 분이다. 그 당시에는 국악 공연을 위한 기획사도 없었다. 동아일보라는 커다란 언론사가 국악 공연 무대를 수없이 만들어 주다 보니 국악인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후진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국악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화정 선생은 직접 소리를 배우시기도 했는데 국악 입문을 얘기할 때는 바로 나와의 인연을 빼놓을 수 없다. 전남 진도가 고향인 나는 판소리 명인이었던 아버지(신치선)로부터 10세 때부터 소리를 배웠다. 엄마 배 속에서부터 들었던 것이 판소리 가락이었다. 아버지가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나보다 못한 사람이 많아 나도 소리를 배우겠다고 아버지한테 졸랐다. 그런데 내가 16세 되던 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마저 병환으로 드러눕는 바람에 집안이 어려워졌다. 1974년 목포에 오셨던 만정 김소희 선생님을 만났고 이듬해 서울에 올라와 만정 선생님의 제자가 됐다. 1976년에는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1980년대 초 어느 날 나와 같은 진도 출신인 미원그룹의 이태욱 상무(전 해태제과 사장)가 김병관 당시 동아일보 전무와 함께 우리 집을 찾아왔다. 이태욱 상무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처음 만나 알게 된 오빠였다. 태욱 오빠는 당시 목포에 있던 우리 집에 찾아와 선 친한테 판소리 북 장단을 배우곤 했다.

북 장단뿐 아니라 소리도 잘했던 태욱 오빠는 화정 선생에게 소리를 가르칠 국악계 선생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만정 김소희 선생 같은 어르신들은 어려우니까 젊은 나를 소리꾼 선생으로 소개시켜 준 것이다.

당시 나는 서울 종로구 원서동 길가에 있는 집에 살았다. 그 작디작은 집에 두 분이 직접 찾아와서 소리를 배웠다. 시간을 정해서 몇 달간 배운 것은 아니고 틈날 때마다 짬짬이 찾아와서 배웠다. 화정 선생은 “아깝다, 내 청춘~”으로 시작하는 ‘흥타령’과 “이산 저산~”으로 시작하는 ‘사철가’를 특히 좋아하셨다. 판소리의 한 대목은 아니고 ‘단가(短歌)’라고 불리는 짧은 노래인데 이 곡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화정 선생님은 국악인들 뒤풀이 자리가 있을 때면 내게 배운 ‘흥타령’을 즐겨 부르셨다. 물론 전문 국악인들이 보기에는 잘하시는 건 아니었고 장단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열정과 흥이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 음악을 부르시려고 노력하시는 모습이 참 멋있었다.

1984년과 1985년에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명인명창 전국순회공연’에 참여해 서울 제주 부산 광주 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를 화정 선생과 함께 돌면서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당시 순회공연팀에는 판소리 박동진 성창순 오정숙 조상현, 가야금 병창의 박귀희 안숙선 강정숙, 경기민요의 안비취 묵계월 이은주, 승무의 이매방, 오고무의 김중자 등 당대의 명인명창들이 총망라됐다. 그때 제주도 공연장 대기실에서 화정 선생과 나, 국악인들이 함께 찍은 추억의 사진을 지금도 갖고 있다. 화정 선생은 나를 비롯해 젊은 국악인들을 마치 동생처럼, 딸처럼 아껴주셨다.

1990년 9월 3일부터 14일까지 옛 소련 9개 지역에서 동아일보 창간 70주년 기념사업으로 창극 ‘아리랑’ 순회공연을 했을 때도 화정선생은 힘든 일정을 끝까지 함께하면서 자상하게 뒷바라지해 주셨다.아리랑은 19세기 말부터 소련 연해주로 이주한 우리 선인들의 고난과 애환, 그리고 그 후손들의 삶을 그린 창극이다. 70여 명의 국악인이 출연하는 대규모 공연으로, 조상현 선생이 작창을 하고 나는 여자주인공 역을 맡았다.

한국과 소련은 1990년 9월 30일에 수교를 맺었으니 수교도 하기 전에 ‘아리랑’ 공연팀이 먼저 소련에 들어간 것이다. 비수교국 소련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 매우 힘든 시절이었지만 공신력 있는 동아일보가 주최했기 때문에 공연이 성사될 수 있었다.

당시 모스크바 타슈켄트 등 광활한 대륙의 9개 지역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는데 참 고생이 많았다. 특히 타슈켄트에서 알마티로이어지는 산악지대를 버스를 타고 넘어갈 때, 멀리까지 뽀얀 먼지가 일어나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하도 오래 버스를 타고 가다 보니까 공연팀이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허허벌판에 무슨 화장실이 있겠는가.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 커다란 천을 대충 둘러쳐 임시 가림막을 설치해 놓고 볼일을 보기도 했다. 당시 취재에 동행했던 동아일보 사진기자가 천막 화장실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사진을 찍어준 것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소련의 도시들은 가로등이 없어 저녁만 되면 완전히 캄캄했다. 가을이라 날씨도 쌀쌀했다. 공연팀이 오랜 이동거리와 일정에 지치고 현지 음식도 입맛에 맞지 않아 무척 힘들어할 때였다. 화정 선생은 공연팀이 지친 모습을 보고 걱정을 많이 하셨다. 화정 선생은 내게 “단원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으니까 돼지고기를 좀 먹일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셨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쇠고기보다 돼지고기 가격이 훨씬 비쌌다.

그래서 내가 “시장에 가서 돼지고기를 사와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나하고 몇몇이 화정 선생이 주신 돈으로 시장에 가서 돼지고기와상추를 엄청나게 많이 사왔다. 호텔에 돌아와서 내가 주동이 되어 돼지고기로 요리를 했고 단원들과 함께 배가 터지도록 먹었다. 상추도 무척 맛있었다. 화정 선생을 생각할 때는 그날의 따뜻했던 마음과 배려가 늘 떠오른다.

1991년에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명인명창 공연 판소리 ‘춘향가’무대에도 섰다. 만정 김소희제 ‘춘향가’의 적통을 물려받은 내게 이 무대는 특별했다. 그날 나는 이도령과 춘향모가 상봉하는 대목을 불렀다. 화정 선생은 그때 사장 인사말에서 “오늘 공연은 판소리 다섯마당 중 가장 예술성이 높은 춘향가의 진수를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소개하셨다. 이어 “인간문화재인 박동진 성창순 오정숙 조상현 씨와 신영희 안숙선 등 현재 활발하게 활동 중인 명창들이 대거 출연해 각 유파 별로 춘향가의 극적인 대목을 열창하게 된다”면서 “우리 음악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국악인들을 사랑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김소희 선생의 제일 큰 제자로서 만정 김소희 판소리 선양회이사장을 맡고 있다. 지난해는 김소희 선생 탄생 100주년이었다. 동아일보는 김소희 선생 판소리 인생 50주년 기념공연도 주최해준 바 있다.

전북 고창이 고향인 김소희 선생은 인촌 선생 시절부터 동아일보와 인연을 맺어 왔다. 영국 유학을 다녀오신 일민 김상만 선생은 클래식, 발레와 같은 서양예술을 좀 더 좋아하셨다. 아들인 화정 선생은 우리 음악과 춤을 더 사랑하셨다. 화정 선생의 부인인 안경희 여사도 국악인들에게 참 잘해 주시고 친절하셨다. 조상현 선생 등 국악인 대여섯 명은 가회동 댁에 가끔 식사 초대를 받기도 했다.

화정 선생은 한국인간문화재진흥회로부터 국악 진흥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감사패를 받으셨다. 동아국악콩쿠르, 명인명창 무대, 창극공연을 후원하는 등의 공로였다. 이처럼 화정 선생이 국악계에 남긴 족적은 넓고도 크다. 그런 화정 선생이 국악계에 입문하실 적에 우리 집에서 소리를 배우셨다는 것이 나에게는 참으로 소중한 인연이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