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김명하
김명하김앤에이엘 회장
내가 화정 선생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8년 한독약품 광고부 책임자로 근무할 때였다. 지금은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가 최대 광고주지만1960년대만 해도 제약회사의 광고가 신문 지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다. 광고 매체로 가장 영향력이 큰 곳이 신문이었고 그 중에서도 잘나가는 동아일보에 광고 지면을 잡기는 만만치 않았다. 하루 24면 시절에 1면이나 사회면 지면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당시 화정은 광고국 차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고 업무는 잘 모르는 듯했다. 내가 광고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가 돌아가는 윤활유 역할을 하는 광고를 왜 하나의 산업으로 여겨야 하는지 설명해 주자 화정은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나는 화정 선생 덕을 톡톡히 봤다. 나는 원래 술을 잘 못했지만 화정 손에 이끌려 무교동에서 밤늦도록 술잔을 기울인 날이 부지기수였다. 나는 술이 약해 화장실에서 토하기도 여러 번 했지만,화정에겐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술자리가 즐거웠다. 세상을 판단하고 약삭빠르게 사는 것이 세태였지만 그는 전혀 달랐다. 말이 많지 않았지만 화정의 인간적인모습에 푹 빠진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화정이 광고국에서 일하던 시절, 필리핀에서 아시아광고대회가 열렸다. 주로 기업체와 광고회사, 매체사 등에서 모였지만 한국에선 화정이 언론인으론 유일하게 이 대회에 참석했다. 마닐라에서 마르코스대통령과 이멜다 여사와 만났는데 마르코스가 화정에게 새마을운동에 대해 많이 물어본 기억이 난다. 한국 경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언론과 광고시장의 현실은 어떤지도 물었던 것 같다.

화정은 언론이 제 목소리를 내려면 확고한 재원 조달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치권력과 행정권력으로부터 독립하는 것 못지않게 기업의 광고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우려면 자본이 튼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신문 판매 수입과 광고 수입이 건실해야 하고 특히 광고 수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했다.

1978년 내가 해태 임원으로 광고협회장을 맡고 있었을 때다.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광고대회에 화정과 함께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광고회사 오너뿐 아니라 백발의 할머니인 뉴욕타임스 발행인과 콜게이트, GE의 최고경영자(CEO) 등이 대거 참석했다. 화정은신문사 발행인까지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를 본 뒤 만찬 자리에서 나에게 불쑥 이런 제안을 했다.

“선진국에선 광고가 하나의 큰 산업인데, 우리나라는 너무 낙후돼있는 것 같다. 세계광고대회를 우리나라에 유치할 수 없을까?”

화정의 이 제안이 모티브가 돼 수많은 준비를 거친 끝에 1994년광고인들이 프랑스 파리로 날아가 세계광고대회를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1996년 제35차 세계광고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정의 직관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49개국에서 신문 방송 광고주 광고회사 등 2700여 명이 서울 코엑스에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대회가 열렸다. 행사 마지막 날 화정은 나를 조용히 불러 “큰일 했다”며 격려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이런 사업을 물밑에서 지원하는 데 화정은 힘을 아끼지 않았다.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는 권력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었다. 정부가 광고주를 압박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못하도록 한 언론탄압에 백지광고로 저항한 것은 발상의 전환이었다. 권력에 저항할 때 기사가 아니라 광고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나는 화정 선생이 살아계신 동안 그가 30대 초반부터 70대 중반까지 40여 년을 함께했다. 그는 큰일을 하면서 작은 일은 곧잘 잊어버리는 성격이었다. 혹자는 화정의 외형만 보고 술을 많이 마신다거나 말이 없다고 얘기하지만 그는 불의와 싸우면서도 정이 넘쳤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본인이 마음 아파 괴로워했고, 반드시 나중에 본심이 아니었다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었다. 단점을 꼽는다면 노래방에 가서 마이크를 놓지 않는다는 것 정도일까.

고려대 동문인 내가 보기에 화정은 고려대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열정과 집념을 갖고 있었다. 영미권의 명문 대학을 벤치마킹해 고려대에 수많은 건물을 지어 하드웨어를 혁신했지만 한 번도 자신을 내세운 적이 없었다. 일민 김상만 선생은 고려대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하는 데 힘썼다. 하드웨어 개선은 화정이 해냈다. 화정은 오너 기업인을 만나 학생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고려대에 투자해 줄 것을 요청했고, 결실은 반드시 고려대 총장이 맺도록 했다.고려대 100주년 기념관, LG-포스코 경영관, 동창회관 등이 모두 화정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고려대 운동장을 녹지공간으로 바꿔 정원을 조성하고 지하공간에 학생 시설 및 대형 주차장을 건설한 것도 화정의 아이디어였다. 처음엔 반대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았지만 나중엔 연세대와 이화여대도 지하공간을 만들면서 고려대를 벤치마킹했다. 고려사이버대를 만든 것도 화정의 결단이 아니었다면 어려웠던 일이다.

일민 김상만 선생이 당대를 수성(守成)했다면 화정은 동아일보와 고려대의 기틀을 완성하고 발전시킨 분이다. 한국에서 기업을 4대째하는 곳은 두산이 유일하다. 언론에선 동아일보밖에 없다.

화정은 신문사 주식을 많이 갖고 있었지만 개인 재산은 별로 없었다. 언론사주 가운데 제일 가난했다. 그는 사심을 챙기거나 사욕을 부리는 일에 관심이 없었다.

자유와 정의를 굽히지 않은 소신의 언론인이었지만 사람들이 그를 잘 모르는 것은 화정이 절대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이를 몰라주는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다.

화정의 소박함은 그가 칠순을 맞은 기념으로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여행 갔을 때도 드러났다. 숙소는 언제나 모텔이었고, 식당은 소박한곳만 찾아다녔다. 기업 오너들이 해외 출장을 갈 때면 직원들은 최고급 호텔과 식당을 예약하느라 부산을 떤다. 하지만 화정은 그런 것을 사치로 여겼다. 1970년대와 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출장을 함께 가도 화정은 항상 나와 같은 방을 쓰자며 꼭 트윈베드 방을 골랐다.

부인 안경희 여사가 돌아가시기 1년 전 화정 선생은 고려대와 자매결연을 한 일본 와세다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와세다대학위 수여식 때 화정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나는 일본과 인연이 많다. 할아버지 인촌은 일본에 항거하는 데앞장섰다. 동아일보는 일본의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와 같이 한국의 주요 신문이다. 일본이 네 번이나 동아일보를 정간시키고 결국 폐간시켰지만 인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이제 그 손자가 일본에 와서이곳 와세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할아버지가 평생 얘기한 것은공선사후(公先私後)이고 육영사업이었다. 학교의 전통은 와세다대가 앞서지만 고려대와 동아일보를 지키면서 나는 두 가지를 절대 잊지않는다. 하나는 언론이고 또 다른 하나는 교육이다. 나는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체제를 신봉하면서 언론을 지키고 고려대를 통해 육영을 신념으로 삼을 것이다.”

5000여 명의 학생이 모두 일어나 기립박수를 쳤다. 화정의 이날 연설은 한국과 일본을 잇는 또 다른 가교 역할을 했다.

화정은 회사 인근 무교동의 오륙도와 용금옥 부민옥 같은 서민 식당을 즐겨 찾았다. 동아일보 기자들과 수시로 술잔을 기울이고 관리사원들과도 소통한 걸로 알고 있다. 신문사 오너 중 화정만큼 직원들과 술을 많이 마신 사람은 없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는 동아일보 1면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꼼꼼하게 읽기로 유명했다. 특히 사설은 철두철미하게 들여다봤다. 주요 부고 광고가 누락되면 광고국에 불호령이 떨어졌다. 술을 마시다가도 부고 광고가 빠진 사실을 알면 난리가났다. 부고는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정보로 제2의 기사라고 생각했기때문이다.

화정은 국악 애호가였다. 한번은 임권택 영화감독이 만든 ‘서편제’가 단성사에서 상영됐는데 관객이 많지 않아 1주일 후 영화를 내려야할 판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화정은 남도의 창(唱)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SBS 윤세영 회장과 한국일보 장재국 사장 등 1993년 봄에 입학한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1기 동기생들에게 SOS를 쳤다. 그렇게 ‘서편제’ 관련 기사가 동아일보는 물론이고 한국일보, SBS에도 소개될 수 있도록 했다. ‘서편제’가 히트를 친 것에 대해 화정을 빼놓고는 이야기하기 어렵다.

요즘 시국을 생각하면 화정이 절로 생각난다. 그가 조금만 늦게 가셨더라도 우리 사회와 언론계에 밝은 불빛을 비춰 주셨을 텐데, 너무도 안타깝다. 화정이 지금 살아있다면 한국 언론의 길잡이가 됐을것이다. 나는 화정의 생애가 일생이업(一生二業)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아일보라는 큰 언론과 명문사학 고려대를 후대에게 물려주면서 수성만 한 것이 아니라 한 단계 발전시켜 넘겨줬다. 지금 화정이 살았다면 쇠약해진 신문 광고의 영향력도 높여놓지 않았을까.

나는 그를 고독한 야생마라고 부르고 싶다. 경주마는 주어진 목표를 갖고 뛰지만 야생마는 험한 길을 맴돌기도 하고 목적지를 스스로 찾아 나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홀로 외로이 판단해야 한다. 앞길에는 뭐가 펼쳐질지 알 수가 없다.

화정은 외로웠지만 아무나 만나지 않았다. 야생마는 풀만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고독을 씹으며 산다. 이제는 저 세상에서 그리워하던 부인 안 여사와 만나 다정함을 나누며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