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김병관

안숙선
안숙선국악인
나는 열아홉 살에 서울에 올라와 만정(晩汀) 김소희 명창(1917~1995에게서 소리를, 향사(香史) 박귀희 선생(1921~1993)에게 가야금을 배웠다. 화정 선생을 처음 뵌 것은 1970년대 후반 스승님을 따라다닐 때였다.

동아일보는 설립자이신 인촌 김성수 선생 대부터 국악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화정 선생은 국악계의 어르신들과 두루 친하게 지내셨다. 김소희 선생님, 박귀희 선생님, 박초희 명창과도 친분이 깊었고, 승무 살풀이 춤의 대가인 이매방 선생님의 춤도 참 좋아하셨다. 동아일보가 주최하는 명인명창 무대에 이분들의 레퍼토리는 빠지지 않았다.

이렇게 화정 선생은 국악계의 어른들과 두루 친하셨는데 그 아래세대로는 성우향 선생님이 늘 함께하셨다. 화정 선생이 스승들 초청공연을 한 뒤에 한정식집에서 뒤풀이를 열어 주시면, 우리 제자들은스승을 따라가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선생님들이 노래를 하기에 앞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 “너 먼저 한 곡 해봐라”고 하면 일어서서 판소리 한 대목을 부르곤 했다.

그런데 1983년 동아일보에서 김소희 선생님 은퇴 공연을 마련해 주셨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3000명의 청중이 꽉 들어찬 가운데 김소희 선생님의 50년 판소리 외길 인생을 마무리하는 무대였다.이 공연에서 김소희 선생님 뿐 아니라 나와 신영희 선배도 무대에 서서 소리를 했다. 김소희 선생님 은퇴 공연을 계기로 동아일보에 소개되었고 이것이 본격적으로 국악 무대에서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화정 선생은 이후로 국악계를 위해 누구도 할 수 없는 큰 역할을 해주셨다. 생활 속에서 즐기는 예술을 넘어서 현대적인 무대예술로국악을 발전시키고, 국악계의 후진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셨다. 화정 선생은 국악인을 만나서 식사를 하실 때면 늘 “동아일보는 민족지이다”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동아일보는 민족의 신문이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혼과 얼이 담긴 우리 음악을 지키고, 만들고, 키워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동아일보가 국악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창설한 것이1962년 명인명창 대회였다. 1971년부터는 판소리 유파 발표회도 시작했다. 명인명창 무대를 통해서 수많은 국악계 스타를 길러냈다. 동아일보는 또한 1989년부터 국립극장과 함께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마다 ‘판소리 완창 무대’를 시작했다. 나는 이 무대에서 흥보가, 심청가, 수궁가, 적벽가, 춘향가 등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완창했다. 이런 완창 무대에 서면서 내 이름이 국악계에 비로소 알려졌다. 언론에서 다뤄줬으니까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긴 판소리를 완창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판소리 완창 무대를 할 때는 국문학과, 국악과 교수님들이 오셔서 먼저 ‘완창은 왜 하는가’ ‘작품 해설’ 등을 미리 강의하신 후에 우리가 춘향전, 심청전 등을 완창했다.

한 달에 한 번씩, 1년이면 12번 판소리 완창 공연을 했다. 판소리완창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렇기때문에 소리하는 사람들은 동아일보의 완창 판소리 무대에 한번 서는 것을 필생의 희망으로 알고 있었다. 이 무대에서 수많은 명창들이 소개되고, 또 이 무대에 도전하기 위해서 많은 젊은 명창들이 공부하고 연습했다. 이러한 과정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현대 국악의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화정 선생이 1985년 국내 최초이자 최고 권위의 국악경연대회인동아국악콩쿠르를 창설하던 때도 생생히 기억한다. 1984년 9월 20일 국악계의 어르신들이 모여서 화정 선생(당시 동아일보 전무)께 “국악계에도 콩쿠르가 꼭 필요하다. 콩쿠르를 통해 젊은 학생들 중에 국악계를 이끌어갈 후진들을 길러내야 한다”고 간곡히 말씀드렸다. 이에 화정 선생은 흔쾌히 수락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동아일보사는 문화주의 사시에 따라 각종 문화 진흥에 진력해 왔다. 그동안 우리 국민의 문화 수준도 이러한 문화 축적을 바탕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제는 우리 고유의 문화유산이 서양 문물에 휩쓸려 설 땅이 없는 현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아국악콩쿠르에서 1등 하면 병역도 면제가 될 정도로 국악계에서는 권위와 품격이 가장 높은 대회로 인정받았고,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동아일보와 화정 선생이 현대 국악계의 신진세력을 길러내고 국악을 대중화하는 데 절대적인 기여를 한 것이다.

또 하나 화정 선생이 국악계에 기여하신 부분은 창극의 활성화이다. 동아일보는 1988년부터 명인명창 무대에 창극을 올렸다. 화정 선생은 “동아일보가 민족지이니 창극의 주인공은 우리 민족의 시련을 이겨낸 민족의 영웅들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전봉준, 안중근, 윤봉길, 홍범도, 임꺽정, 김구 등 민족 지도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신창극을 매년 무대에 올렸다.

동아일보 주최 신창극에는 국립창극단 배우들도 많이 참여했지만 국악계 스타들은 모두 참여하는 무대였다. 조상현 명창이 임꺽정을 했고, 내가 임꺽정 마누라 역할을 했다. 나는 배우 김명곤 씨가 안중근 의사 역을 할 때는 안중근 어머니 역할을 맡았다. 이 밖에도 홍범도 어머니, 윤봉길 어머니 등 거의 모든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명인명창 무대, 완창 판소리, 창극을 공연할 때마다 화정 선생은 매번 객석에 오셨다. 공연만 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연습 장소까지 제공해 주셨다. 특히 창극을 할 때는 연습 장소가 따로 없어서 고생했는데, 동아일보 충정로 사옥 맨 위층의 강당을 빌려 주셔서 연습을 할 수 있었다. 충정로 사옥 맨 위층 강당에서는 동아국악콩쿠르 예선과 결선도 수없이 펼쳐졌다.

화정 선생은 국립극장에서 창극 리허설을 할 때도 찾아오신 적 이있다. 연습을 보시다가 “그 장면에서는 총소리도 나야 하는 것이 아니오?”라고 의견도 서슴없이 말씀하셨다. 연출의 권한을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긴 하지만, 그만큼 관심과 열정이 많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공연이 끝나면 화정 선생은 반드시 출연한 국악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뒤풀이를 열어 주셨다. 국립극장에서 공연할 때 화정 선생이 자주 초청해 주셨던 집이 서울 이태원 부근에 있던 호남집이었다. 남자 주인은 키가 큰 분이었고, 아주머니는 음식 솜씨가 뛰어난 분이었다. 두 분 모두 돌아가셨다.

화정 선생은 출연한 국악인들도 챙겼지만, 당시 고법의 명인으로 활동했던 고 천대용 씨(1930~2001)도 꼭 불러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천대용 씨는 명고수로 이름을 날리기 전에는 먹갈치 장사를 했다는데, 뒤풀이 자리에서 먹갈치 장사하던 시절의 소리를 판소리 조로 부르곤 했다. “비늘이 번쩍! 번쩍번쩍! 번쩍허니~! 제주에서 온 좋은 먹갈치~!” 천대용 씨의 먹갈치 파는 성음을 화정 선생이 무척 좋아했다. 소리하는 사람 챙기기도 바쁠 텐데 고수를 했던 천대용 씨까지 꼭 불러서 소리를 듣고, 용돈도 두둑이 주시면서 많은 도움을 주셨다.

화정 선생은 뒤풀이 때마다 우리 민요 ‘흥타령’ 한 곡을 직접 부르시곤 했다. 흥타령의 가사는 ‘아깝다. 이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따라 봄은 가고 봄 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 어이할까! 아이고 데고 흥 성화가 났네 흥’ 하는 내용이다. 흥타령은 판소리가 아니고, 짧은 시 한 대목에 곡을 붙여 만든 민요다. 화정 선생은 이 곡 하나는 잘 부르셨다. 아마도 가사가 마음에 드셨던 것 같다. 화정 선생의 민요 가락은 특색이 있었다. 흥타령은 원래 애절한 것인데, “으~” 하는 소리를 내면서 깊이 있는 마음을 담아 아주 걸쭉하게 잘 부르셨다. 전문 국악인들이 듣기에는 소리를 잘하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우리 민요 한 곡을 전부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 사실 자체가 대단한 것이었다. 민요를 배우고 익히지 않았다면 그렇게 부르지 못했을 것이다. 대중가요 중에서는 노사연의 ‘만남’을 잘 부르셨다.

화정 선생은 가회동 자택으로도 국악인들을 많이 초대하셨다. 말년에는 가회동 자택에 별채로 한옥을 지으셨다. 화정 선생은 “앞으로 이 한옥에서도 소리 공연을 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제로이곳에 국악인을 초대해 소리도 들으셨다. 박동진 선생도 오셔서 ‘변강쇠가’를 부르기도 했다. 댁으로 모시고 싶은 손님이 있을 때 간단히 식사도 하고 그런 장소로 활용하셨다. 그런데 몸이 아프신 이후로는 그럴 기회도 많이 줄어들었다.

나는 화정 선생이 국악인을 초청해서 하는 행사에는 꼭 참석했다.그동안 화정 선생이 국악계에 베풀어준 은혜가 너무나 커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화정 선생이 돌아가셨을 때는 영결식이 열렸던 고려대 화정체육관에서 내가 흰색 치마저고리를 입고 ‘비목’의 작사가 한명희 선생님이 가사를 쓴 조가를 불렀다. 이 노래를 듣고 많은 조문객들이 눈시울을 훔쳤다.

“제 소리, 제 장단을 아끼시며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하신 화정 선생님…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산진이 수진이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너머 피안의 세계로 정녕 가시나이까.”

화정 선생은 1999년 동아국악콩쿠르 창설, 국립극장 완창 판소리 발표, 창극 공연 주최 등 국악 진흥 발전의 공로로 국악계의 감사패를 받았다. 화정 선생은 우리 음악을 사랑하고 즐길 줄 아는 언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고, 국내 몇 손가락 안에 드는 풍류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화정 선생이 국악의 무대예술화를 위해 너무나도 큰일을 해주셨다. 그때는 잘 몰랐다. 만약에 지금도 생존해 계신다면 국악계를 얼마나 더 깊이 있게 발전시키셨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화정 선생은 국악에 대한 철학과 정신이 남다른 분이셨다. 국악계가 배고프고 힘들었던 시절, 화정 선생에게 정말 많은 신세를 졌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