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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유의 수호자들’(上) (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22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자유의 수호자들’. 이승만 트루먼 대통령과 백선엽 클라크 장군 등 양국의 장군들을 함께 모았다. 구자룡 기자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지하 전시실에는 ‘자유의 수호자들’과 ‘새벽의 침략자들’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수호자는 한미의 대통령과 장군들, 침략자는 북-중-소의 최고 지도자와 군사령관들이다.

6·25 전쟁이 3년 넘게 계속되면서 정치 및 전쟁 지도부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미국은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1952년 11월 대선에서 당선돼 프랭클린 루즈벨트 이래 민주당의 20년 집권이 끝났다. 31년 철권통치를 해온 소련 스탈린도 1953년 3월 75세로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직선제 개헌의 정치 파동속에 권력을 유지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과 북한 김일성은 굳건히 자리를 지켰다.

6·25 전쟁을 지휘한 유엔군사령관은 맥아더 해임 뒤 리지웨이와 클라크가 뒤를 이었다. 미 육군과 한국에 파견된 16개국 병력, 그리고 작전권을 이양한 한국군을 지휘했던 미 8군 사령관은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 그리고 테일러 등 4명이었다.

‘자유의 수호자’ 정치 지도자와 군 사령관들은 공산측 불법 침략 격퇴 목표는 같았으나 방법론과 군사 작전의 범위, 작전 성향 등에서 차이가 적지 않았다. 이런 차이가 전쟁 수행과 전개에도 영향을 미쳤다.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과 맥아더의 상호불신과 불화에 대해서는 본 시리즈의 <17회> ‘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 편에서 다룬 바 있다. 두 사람의 충돌에는 개인적 성장 배경과 직업적 경험 차이, 군인과 정치인, 정치 진영의 차이, 대통령과 전쟁 영웅으로서 각자가 가진 대중적 지지 등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두 사람의 긴장과 갈등은 맥아더의 해임으로 일단락됐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대통령과 전쟁 지휘관이라는 상하 관계에서 나타난 커다란 이견과 갈등은 6·25 전쟁 과정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 여파는 인천상륙작전, 북진, 만주 폭격, 원폭 사용, 대만 국민당 군대의 참전 허용 여부 그리고 휴전회담까지 주요 고비마다 지속적으로 나타났다. 여러 사안을 관통하는 것은 ‘전쟁에 승리 외에는 없다’며 필요하면 핵사용과 만주 폭격을 주장하는 확전론(맥아더)과 소련의 개입 등 제3차 대전으로의 확전을 막는 등 ‘전장의 승리보다 전략적 정치적 판단이 우선해야 한다’는 제한론(트루먼)의 차이였다. 여기에 유럽과 아시아에 대한 우선 순위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도 변수로 작용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는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을 정확히 예측, 대비하지 못해 압록강까지 북진했다가 다시 밀려 내려왔다. 한 때 37도선까지도 밀렸던 전선이 38선 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이른 뒤 휴전론이 높아질 때 맥아더는 물러났다.

퇴임 후 ‘사라지지 않은 맥아더’

맥아더는 의회 고별 연설에서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고 했으나 그는 퇴임 후 사라지지 않았다. 1년 간 미국을 종횡무진하며 미국의 위기를 역설하고 다녔다. 군복에 훈장을 모두 매달고 전국을 다니며 때로는 변덕스런 정치적 연설을 했다. 하지만 그가 트루먼을 맹렬히 비난할 때마다 그의 위상은 조금씩 흔들렸다고 한다.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영웅의 모습과 조금씩 멀어졌기 때문이다.(맨체스터, 561쪽)

그의 연설 중에는 ‘서유럽 방어의 제1선은 엘베 강도 아니고 라인강도 아니다. 그것은 압록강이다’라며 아시아 우선주의를 견지했다. 자신의 해임을 두고 트루먼과 논쟁을 벌이는 등 ‘평생 군인’에서 우익의 신념을 대변하는 당파적 정치가가 되었다. 그의 ‘반 트루먼 행정부’ 유세에 트루먼은 “맥아더는 가짜클럽이 있다면 출마도 필요없이 회장이 되었을 것” “진실이라고는 한 푼어치도 없는 인간”이라고 역공했다. 트루먼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점령군사령관으로서 전후 일본을 창설한 맥아더를 제외하는 것으로 뒷끝을 보였다.

맥아더는 1952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공화당 후보 아이젠하워를 반대하고 태프트와 손잡고 대권의 꿈을 꾸기도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크고 하얀 집’(백악관)에 대한 정치적 희망이 무너진 뒤 민간 기업 ‘스페리 랜드’의 이사회 의장을 맡아 주주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때론 자신을 ‘원로 정치가’로 언급하기도 했다.(맨체스터, 587쪽) 케네디 대통령은 맥아더를 ‘숭앙’해 자주 백악관으로 초청, 조언을 들었다. 맥아더는 “아시아 땅 위에서 미군 병사가 싸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충고했다. 1964년 4월 뉴욕 월도프의 호텔에서 급성신부전 등으로 생을 마감해 ‘노병은 사라졌다’.

경기 파주 임진간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 동상. 파주 = 홍진환 기자

사후 재평가 받은 트루먼

2021년 미국 정치전문매체 C-SPAN의 조사에서 트루먼은 존경받는 역대 대통령 6위에 올랐다. 링컨 워싱턴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그리고 아이젠하워에 이은 것이다. 6·25 전쟁 기간 두 명의 미국 대통령이 모두 40여명 미국 대통령 중 5,6위를 차지했다.

트루먼은 ‘우연히 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 대통령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에 오르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재선 임기를 마친 뒤에도 인기가 높지 않았다. 그는 사망 20여년이 지난 1990년대에 비로소 냉전시대의 초석을 닦았던 많은 업적이 새삼 부각됐다. 영국 처칠 수상이 그에게 “서양 문명을 구했다”고 한 말에 걸맞는 평가를 뒤늦게 받았다.(강성학, 8쪽)

트루먼은 1945년 4월부터 1953년 1월까지 두 차례 임기 동안 많은 결단을 내렸다. 유엔 창설, 포츠담 회담, 일본 원자탄 투하, 마샬 플랜, 이스라엘 건국 산파, 베를린 봉쇄에 맞선 공수작전, NATO 창설, 수소탄 개발 결정 그리고 한국전 참전과 유엔군 결성 등.

경북 칠곡 다부동 전적기념관에 세워진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 사진제공 유동열 자유민주연구원장

북한의 침략에 신속한 미군 투입 등으로 6·25 전쟁에서 한국을 구한 것에 비하면 한국내의 평가는 높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그의 동상이 경기도 파주 임진각의 한 켠 미군 참전비 앞에 세워져 있는데 인천자유공원에서 인천항을 내려보며 랜드마크가 된 맥아더 동상과도 차이가 있었다. 정전 협정 70년을 맞은 7월 27일 경북 칠곡 다부동전적기념관 앞에 트루먼과 이승만 대통령 동상이 나란히 세워졌다.


한국전쟁 중의 맥아더와 워커.

낙동강방어선을 지킨 ‘불독 장군 워커’

워커(1889〜1950)는 1950년 7월 14일 전황이 최악일 때 도쿄에서 부임했다. ‘죽느냐 지키느냐(stand or die)’의 결의로 낙동강방어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지켜냈다. ‘워커 라인’이 무너지지 않아 인천상륙작전 및 북진 반격이 가능했다. 번쩍거리는 철모와 강한 인상처럼 바람앞의 등불 같았던 초기 급박한 전황을 지켜낸 ‘불독 장군’이었다.

하지만 워커는 주변에서 두루 신뢰를 받지 못했다.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갈 때 미 육군은 8월 초 리지웨이 중장을 한반도에 파견해 워커의 지휘 방식을 조사했는데 워커의 참모들이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는데 놀랐다고 한다. 일부 연대장들은 전투 경험이 거의 없었고 병사들은 투혼을 발휘하던 2차 대전 때와 달랐다. 워커 파면 얘기까지 나올 만큼 맥아더나 참모들은 워커를 신뢰하지 않았다.(핼버스탬, 219쪽)

경기도 평택 ‘캠프 험프리스’ 미국 기지의 워커 동상.

워커는 낙동강이 급박하다며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을 반대했다. 따라서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 과정에서 맥아더는 알몬드 소장의 미 10군단 지휘권을 워커에게서 분리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승만 대통령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국군은 왜 잘 싸우지 못하냐며 내놓고 불평을 한데다 매너가 고분고분하지 않아 심기를 건드릴 때가 있었다. 이승만은 이따금 “버릇없는 친구였어”라며 불만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워커와 후임인 리지웨이의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잘된 것은 미군 탓, 잘못된 것은 국군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백선엽, 2009, 175쪽)

경기도 양평 지평리 전투 기념관에 전시된 리지웨이 장군. 지평리 전투는 그의 부임후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격퇴하고 유엔군이 자신감을 갖게 한 계기가 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공중증(恐中症) 극복한 리지웨이의 ‘위력 수색’

리지웨이(1895〜1993)는 워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지면서 12월 27일 한국에 왔다. 그는 오른쪽 가슴 멜빵에 수류탄을 차고 있어 별명이 ‘철의 가슴(Old Iron Tits)’이란 별명이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는 독일군 후방에서 공수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맥아더가 육사 교장시절 체육 교관으로 함께 근무했다. 맥아더는 자신의 선택과 천거로 워커 후임으로 왔다고 했다.(리지웨이 회고록 ‘향군’ 1월호, 124쪽)

그가 워커 후임으로 부임한 때는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뒤 북진했다가 중공군 참전으로 올라갈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밀려 내려오던 때였다. 그가 한국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2월 26일 중공군은 38선을 돌파해 내려왔다.

그는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려 침체되고 패배주의에 빠져 있는데다 전황에 따라서는 한반도에서 철수를 검토하는 상황에 부임한 것이다. 그는 유엔군의 분위기를 쇄신하기 위해 ‘중공군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그의 ‘위력(威力) 수색’은 섬멸을 위한 전초전격이다. 화력을 갖춘 수색 부대를 적진 깊숙이 투입해 적의 반응을 보고 직접 타격도 가하는 수색 및 기동타격전이다.

‘울프 하운드 작전’으로 불린 수도권 위력 수색에 이어 한강 이남까지 범위를 넓힌 ‘썬더 볼트’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때는 직접 헬기로 현장을 순시하면서 중과부적인 상황에서 승리를 이끌어 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자신감을 되찾게 했다. (백선엽 3권, 172쪽)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는 유리하면 밀어붙여 요충지를 점령하고 불리하면 빠르게 물러나 는 리지웨이의 전술을 중공군이 꼼짝달싹못하게 붙잡아 놓는 ‘자석 전술’이라며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음을 토로했다. 중공군이 보급 문제 때문에 공격에 일정한 주기가 있다는 것을 간파하고 이에 맞춰 대응하게 했다. ‘중공군이 가장 두려워한 장군’이었다.(훙쉐즈, 215쪽)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