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자유의 수호자들’(上)(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자서전.

맥아더와 다른 길을 간 리지웨이

트루먼 대통령과 확전론, 휴전에 대한 견해 차이 등으로 맥아더가 해임돼 후임으로 임명된 리지웨이가 워싱턴의 뜻에 맞춰 맥아더와 다른 지휘 노선을 보인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리지웨이는 “전쟁이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내 권한 범위 내에서 실행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는 것”이 유엔군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임무라고 했다.(리지웨이, 228쪽) 리지웨이는 미 8군 사령관으로서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온 중공군에 반격을 가해 섬멸작전으로 남진을 저지했다. 하지만 중공군과 대치 상황으로 변한 뒤 유엔군사령관이 되었을 때는 전략적 중점이 ‘공세에서 수세’로 바뀌었다.

백선엽 장군은 리지웨이 8군 사령관의 리더십 덕분에 1·4 후퇴로 내주었던 서울을 되찾고 남쪽으로 밀려가던 전세를 뒤집어 반격해 올라가게 됐다고 했다. 다만 유엔군사령관으로 옮겨간 뒤에는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한반도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고 평가했다.(백선엽 1권, 169쪽).

그의 수세적이고 제한전쟁에 머무는 전략으로 예성강 너머의 개성이나 동부 전선에서 금강산 일대를 차지하려는 작전에 모두 반대했다고 백선엽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선엽은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이던 1950년 10월 평양∼원산 선까지는 못가도 예성강까지는 탈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반도가 과거 통일국가로서 전통을 갖고 있어 휴전도 통일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리지웨이는 어디서 들었는지 과거에도 마한 진한 변한 3국의 세 갈래로 나눠진 적이 있다는 말까지 하면서 공격적인 전선 끌어올리기 작전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백선엽, 2009, 253쪽)

특히 1951년 6월 경 미군이 가진 제7함대 등 전력이라면 동부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압박할 수 있다며 밴플리트 8군 사령관도 적극 관심을 보인 고저(庫底) 상륙작전을 불허했다. 이는 한미 4개 군단이 참가해 원산 동남쪽 30km 고저를 점령하는 등 동부 전선을 훅 끌어올리는 야심찬 계획이었다. 양구군 해안면과 금강산을 거점으로 하는 적군을 포위 섬멸해 동해안 북위 39도까지 확보하자는 것이었다. 리지웨이는 미 합참에 올리지도 않고 자신의 선에서 차단해 버렸다. 그런 리지웨이는 북진 통일까지 꿈꾸던 이승만과는 ‘물과 기름’처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 확전에는 반대 신념이 확고했다. 공군이 만주 지역을 공격하면 공군의 자연적 소모와 전투 손실로 유럽의 미군이 약 2년동안 적의 공군력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이다. 설사 확전으로 맥아더가 추구하는 승리가 한국에서 달성돼도 다른 곳에서는 균형을 깨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맥아더가 아시아에서 무너지면 유럽도 위험하다며 아시아를 중시한 것과 대비된다.(리지웨이, 207쪽)

▽ 전사한 장군과 장군의 아들

6·25 전쟁 3년 중 많은 장병들이 희생됐다. 고위 장성들은 전투를 지휘하다 전사하거나 부대 시찰을 위해 이동 중 자동차나 항공기 사고 등으로 순직했다. 장군의 아들들은 대부분 현장에서 작전 중 전사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전시지 표지석. 구자룡 기자

워커,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

1호선 도봉역 2번 출구를 나와 도봉로를 건너 우측으로 조금 걸어가면 대로변 검은 돌 위에 4개의 별이 새겨져 있다. ‘미 육군 대장 월튼 해리스 워커 전사지’ 표지판이다. 표지석 윗면에는 실제 전사한 곳 주소가 ‘도봉 1동 596-5 번지’로 안내되어 있다. 표지석에서 100여m 떨어진 이면 왕복 2차로길인 ‘도봉로 169나길 55’의 건물에 낯익은 워커 장군의 사진이 2층 벽에 새겨져 있다. 낙동강방어선을 지키며 했던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는 말이 그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곳에 걸려있다.

서울 도봉구의 워커 장군 실제 사망 지점에 있는 건물 2층에 워커 사진이 새겨져 있다. 구자룡 기자

워커 미 8군 사령관은 1950년 12월 23일 오전 11시경 의정부 남쪽에서 손수 지프를 운전했다. 이날 미 24사단 소속 외아들 샘 워커 대위 등에게 북진 전공으로 사령관 표창장을 줄 예정이었다. 그의 가방에는 아들에게 줄 표창장이 있었다. 그는 중앙선을 넘어온 국군 6사단 2연대 소속의 민간인 수리공이 몰던 쓰리쿼터 트럭에 측면을 받혀 차가 뒤집어지면서 차체에 깔려 야전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관 등 동승자는 중상을 입었다. 워커는 사후 대장에 추서됐다. 아들 샘 워커도 1977년 최연소 육군 대장으로 진급해 육군 사상 처음으로 부자 4성 장군이 됐다.

워커 장군의 이름을 띠 지어진 서울 워커힐 호텔의 한 켠에 워커장군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구자룡 기자

중공군 부사령관 훙쉐즈(洪學之)는 ‘워커가 후퇴하던 길에 자동차 사고로 숨졌는데 상대의 후퇴길이 어느 정도로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고 기록했다. 정확한 전사를 기록하기보다 적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자신들 편의에 맞게 꾸민 것이다.(훙쉐즈, 174쪽) 심지어 북한중앙통신은 2년여가 지난 기사에서 워커가 인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 날조했다.

헬기 사고, 작전 중 사망 미국 장교들

경기도 여주의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

브라이언트 무어 소장(1894〜1951)은 1951년 1월 31일 제9 군단장으로 부임해 3주만인 2월 24일 ‘킬러 작전’을 전개하며 ‘남한강 도하 작전’을 지휘하던 중 여주 북쪽 한강변에서 헬기 추락으로 순직했다. ‘킬러 작전’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극복하고 반격의 전환점이 된 지평리 전투(2월 13〜15일) 이후 적에게 휴식과 재편성의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한 공세작전이었다. 사고 현장인 경기도 여주에는 ‘무어 장군 추모 전적비’와 ‘무어 장군길’이 있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미군 장성은 워커 중장과 무어 소장 두 명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미군 장성 아들은 모두 142명이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 워커와 밴 플리트 8군 사령관은 부자(父子) 모두 함께 전장에 있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대통령 당선 이후에도 미 3사단 대대장으로 복무했다. 미군 고위 장성의 자녀 중 사상자는 35명이었다.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50년 졸업 기수 전사자 추모비. 6·25 전쟁이 나던 해 졸업해 투입돼 초급 장교로 근무하다 숨진 것이다. 구자룡 기자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있는 미 육사 1949년 졸업생 전사자 추모비. 동기생들이 세워놓은 것이라고 한다. 구자룡 기자

미 해병 제1항공사단장의 아들 해리스 소령은 장진호 전투에서 아버지의 항공 지원하에 육상에서 장진호를 돌파하는 임무를 수행하다 하갈우리에서 전사했다. 클라크의 아들 마크 빌 클라크 대위는 세 번이나 부상을 입어 제대 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1129일의 전쟁’, 414쪽)

장진호 전투에서 호수 동쪽을 맡았다가 괴멸적 타격을 입은 미 육군 7사단 31연대의 매클린 연대장은 적군을 아군으로 오인해 접근하다 붙잡힌 뒤 사망했다. 그는 중공군 80사단에 포위돼 철수 작전을 벌이던 1950년 11월 29일 장진호 동쪽 풍류리강 안곡에서 남쪽에서 접근하는 부대를 보고 후방에서 오는 예하 2대대로 착각하고 손을 흔들며 접근했다. 그는 중공군 병사들에게 끌려간 뒤 연락이 끊겼다. 그는 포로가 되어 이동하다 12월 초 부상당한 상처 때문에 사망한 것으로 뒤에 알려졌다. 동료들은 그를 도로 옆에 묻어주었고 실종 8개월 후 그에게 수훈십자훈장이 수여되었다.(애플먼, 189쪽)

경기도 오산 미공군 기지의 밴플리트 중위의 흉상.

밴 플리트 2세의 마지막 편지

밴 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의 아들 제임스 밴 플리트 주니어 중위는 아버지가 미 8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B-26 폭격기를 몰고 압록강 남쪽 80km 지점의 북한 순천 지역에서 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대공포를 맞고 실종됐다.

그는 밴 플리트가 결혼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이었다. 밴플리트 중위는 2년 전 결혼한 부인과 사이에서 돌이 갓 지난 아들이 있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내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내 자식을 찾는 일로 다른 장병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된다”며 적지에서의 수색 작업 중단을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에게 요청했다.

밴 플리트는 자신의 아들을 잃은 뒤 자신처럼 한국전선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부모들에게 위로 전문을 보냈다.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남정옥, 105쪽)

아버지처럼 전장에서 가족에게 자주 편지를 썼던 밴 플리트 중위는 실종 보름 전 역시 어머니에게 ‘군인의 아내에게’로 시작하는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사람이 두려움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조그마한 힘이 되어 주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하지 마시고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소집된 승무원(항공사, 폭격수, 기관총사수)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어머니의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남정옥, 101쪽)

밴 플리트 2세처럼 6·25 전쟁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미군 조종사는 1920명에 달했다. 한미동맹친선협회가 밴 플리트 대위(사후 대위 추서)의 흉상을 오산 공군기지에 건립한 것은 이들의 희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2022년 9월 정부세종청사 내 보훈처 건물 5층 회의실 명칭을 ‘밴플리트홀’로 바꿨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의 채병덕 장군 전사비.

백의종군하다 전사한 채병덕 장군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육군총참모장(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한 직후인 6월 30일 해임됐다. 채 소장은 백의종군을 자청해 후방에서 병력을 보충하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는 것이 임무인 경남지구 편성군사령관이 됐다.

그는 7월 23일 호남을 통해 영남으로 장갑차를 앞세우고 오는 북한군 1개 대대를 섬멸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24일 부산과 마산의 병원에서 모은 가벼운 부상병으로 1개 대대를 편성해 떠났다. 그 때 갓 태어난 아들 이름을 ‘영광의 진격’이라는 뜻의 영진으로 짓고 하동으로 떠났다. 채병덕은 미군 19연대와 합동 작전을 벌이다 7월 27일 전사했다. 아군의 군복과 장비를 착용한 북한군을 검문하기 위해 접근해 “적인가 아군인가?” 라며 묻자 바로 총격을 가했다. 경남 하동 ‘쇠고개 전투’ 현장에는 전사비가 세워졌다. 정부는 그를 중장으로 진급시키고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경남 거제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옆 흥남철수 기념공원에 세워진 김백일 장군 동상. 거제 = 구자룡 기자

1951년 3월 27일 리지웨이 사령관은 여주 미 8군 전진 지휘소에서 한미 양국의 사단장과 군단장을 전원 소집했다. 이날 여주회의를 마치고 경비행기 편으로 강릉으로 귀환하던 김백일 1군단장(소장)이 악천후로 탑승기가 대관령 산중에 추락했다. 유해는 5월 9일에나 발견됐다.

김백일 소장은 흥남철수의 영웅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이용문 준장.

이용문 준장(1916〜1953)은 육군참모학교 부교장 때 6·25가 터졌다. 서울에서 부대가 와해되자 남산에 숨어서 게릴라전을 폈고 서울이 공산 치하에 들어간 뒤에는 행상으로 변장해 북한군 동향을 파악하다 이듬해 6월 준장으로 군에 복귀했다. 1953년 남부지구경비사령관으로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 토벌 작전을 지휘했다. 정전 협정 체결을 한 달여 앞둔 그해 6월 24일 남원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검사장 출신 전 자민련 소속 이건개 전 국회의원의 부친이다.

참고 문헌
강성학 지음, 『대한민국의 대부, 해리 S. 트루먼』, 박영사, 2021.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데이비드 핼버스탬 지음, 정윤미 이은진 옮김, 『콜디스트 윈터』, 살림, 2009.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매슈 B. 리지웨이 지음, 박권영 옮김, 『리지웨이의 한국전쟁』, 플래닛미디어, 2023.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1〜3권, 2020.
윌링엄 R. 맨체스터 지음, 박광호 옮김, 『맥아더 2』, 미래사, 2016.
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향군』 1991년 1~3월호, 대한민국재향군인회, 1991.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