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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앞의 납북 재현 조형물. 파주 = 홍진환 기자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입구에 납북된 가족들이 사진이 원형 조형물에 전시되어 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6·25 기획 납북’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1956년 발표된 ‘단장의 미아리 고개’ 가사에 6·25 전쟁이 남긴 상처 중 ‘강제 납북’의 사연이 그대로 담겨있다.

북한은 전쟁 중 모든 점령 지역에서 남한 사회 각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사들에 대한 납치 계획을 세웠다가 조직적으로 납치하는 ‘기획 납치’를 자행했다.

납치 대상은 ‘저명인사’, 북한에 적대적인 ‘우익인사’, 남한 사회 요직에서 활동하던 ‘지식인 계층’ 등 크게 세 부류였다. 저명인사들은 납치된 뒤 북한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하는데 동원됐다. 당시 언론에는 각급 법원 판사 38명이 행방불명으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을 수도 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동아일보 1950년 11월 12일 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민족대표로 참가했던 김규식, 손진태 서울대 문리대학장, 미군정청 민정장관과 2대 국회의원을 지낸 안재홍, 손기정 일장기 말소사건 때 동아일보 기자로 일장기를 지웠던 이길용, 국학자 정인보 등이 대표적인 저명인사들이었다.

북한은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병력 손실이 커지고 보급이 어려워지자 점령지에서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청장년을 강제 징집했다. 북한의 인재 납치는 북한 체제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고 남한에는 인력 활용에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납북 피해자는 10만 명가량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수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경기도 파주 임진각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6·25 전쟁 당시 북한의 기획 납북 실태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적대세력’으로 분류되는 인근 주민 4명에 대한 조사 보고서. 좌익들의 활동을 통해 조직적으로 납북을 실행한 증거다. 국립 6·25전쟁 납북자기념관 전시. 파주 = 홍진환 기자

‘전후(戰後) 납북자’

납북자 가족의 고통은 이산(離散)의 아픔에 그치지 않는다. 납북 가족이 정치적 선전에 이용되고 일부는 간첩으로 남파되는 등의 공작으로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인식도 생겨났다. 심지어 납북이 월북으로 오인되는 일까지 있어 사회적 불명예와 차별까지 당하는 경우도 있다.(납북자기념관, 78쪽) 북한은 ‘납북자는 없다’고 주장하며 생사 확인마저 거부하고 있어 납북자 구출을 위한 노력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북한의 납북, 납치가 6·25 전쟁 정전협정이 맺어진 후에도 계속됐다. 북한은 협정 이후 어선 비행기 납치와 베트남 전쟁 등을 통해 국내외에서 남한 국적을 가진 민간인 총 3835명을 납치했다. 이 중 500여명의 ‘전후 납북자’는 북한에 억류되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어선 납치가 대부분이지만 백주 대낮 여객기 납치도 있었다.(납북자기념관, 146쪽)

1987년에는 ‘동진 27호’ 어선이 납북됐다. 가족 일부는 몇 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했다. 최연소 선원 임국재 씨는 3차례 탈북을 시도하다 붙잡혀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됐다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1969년 12월 12일 자 동아일보 1면. 51명을 태운 KAL 여객기가 강릉에서 이륙한 뒤 납북돼 선덕에 강제 착륙했다고 보도했다.

KAL 납치 ‘특수이산가족’이 된 미귀환자

그간 정부는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섰던 국군포로 송환에 손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전후 납북자’ 중 대한민국 상공에서 납치해 간 여객기의 승무원과 승객들도 사실상 방치했다.

1969년 12월 11일 오전 9시 반 강릉발 김포행 첫 비행기 YS11A가 권총을 소지한 채 탑승한 간첩 조창희(당시 42세)에 의해 납북됐다. 64인승 쌍발기에는 승객 47명과 승무원 4명이 탑승했다. 1970년 2월 14일 KAL기 납치 피해자들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으나 승무원 4명과 승객 7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2월 26일 평양고려호텔 이산가족 상봉장에 KAL 승무원 성 모 씨가 김일성대 교수인 남편, 20대의 아들딸과 함께 ‘특수이산가족’으로 나와 남측의 모친을 만났다. 다른 미귀환자 10명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윤석열 정부의 통일부는 ‘납북자 대책반’을 운영하기로 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지 관심이다.

尹 정부, ‘납북자 대책반’

윤석열 정부는 통일부에 납북자와 국군 포로, 억류자 문제 담당 기구를 장관 직속으로 신설해 운영하기로 했다. 정전 협정 체결 70주년을 하루 앞둔 7월 26일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에 납북자 전담부서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이같은 요구가 나온 지 사흘 후 신임 김영호 장관이 취임하면서 통일부가 내놓은 방안이다. 납북자 전담 기구에 대해 “통일부 조직의 어젠다이자 장관의 어젠다로 챙기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정전 70년을 맞으면서 가장 큰 현안으로 남았던 납북자 및 가족들의 인도적 비극과 상처가 어느 정도 치유될 수 있을지 관심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로 남북 관계가 어느 때보다 경색되어 있는 가운데 북한 정권의 ‘아킬레스건’인 인권 문제에서 어떤 진전이 있을지 관심이다.

참고 문헌
유영복,『운명의 두 날』, 도서출판 WON, 2010.
이혜민 지음, 『아무도 데리러 오지 않았다』, 깊은 바다 돌고래, 2023.
허재석 지음,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 원북스, 2008.
『잊지 않기 위하여』,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 2019.
김강녕, ‘한국의 국군포로문제 해결노력과 향후 과제’ 『한국과 세계』, 제1권 2호, 2019.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