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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남북에서 잊혀진 사람들(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21회]

1호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소위. 탈북 후 43년 만에 부대 복귀 신고를 했다.

1994년 10월 23일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탈출해 중국을 거쳐 해상을 표류하던 60대 초반의 남성이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조됐다. 1호 탈북국군포로 조창호 소위였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 다수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북한은 숨기고 남한은 잊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서도 이름 없는 탈북국군포로

유엔사 자료 등에 따르면 정전협정 후 공산군에 붙잡힌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여명, 이 중 8343명만이 인도되고 나머지는 북한에 억류됐다.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수용소를 거쳐 탄광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북한 내 국군포로는 2014년 560여 명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집계된 후에는 정확한 숫자도 파악되지 않고 있다. 조창호 소위 이후 2010년까지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한국으로 왔다. 고령으로 일부만이 생존해 있다. 탈북국군포로는 북한에도 가족이 있어 살아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죽어서 부고도 내지 않는다고 한다.

탈북국군포로들의 수기집.

북한은 국군포로들을 억류한 뒤 ‘내무성 건설대’를 조직해 탄광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국군포로로 강제노역 건설대가 조직됐다는 사실은 2000년 7월 탈북한 유영복 씨의 증언과 수기집 ‘운명의 두 날’을 통해 처음 알려졌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탄광에서 임금은 커녕 안전장치도 없이 강제노역에 시달리고 차별 속에 지낸 사실이 몇몇 탈북 국군포로의 수기에 나와 있다. 허재석 씨는 ‘내 이름은 똥간나 새끼였다’에서 “국군포로는 죽어도 괜찮다는 생각으로 안전교육도 시키지 않고 바로 굴속으로 밀어 넣었다. 제일 낮은 막장에서는 기온이 40도까지 올라 숨쉬기도 힘겹고 땀을 비 오듯했다. 한참 일을 하다 보면 사람인지 짐승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지옥이었다”고 증언했다.(허재석, 34쪽)

더욱이 국군포로는 본인이 평생 ‘43호’라는 낙인이 찍혀 차별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식에게도 이어졌다. 자식들도 ‘43호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진학이나 군입대, 취업 등에서 차별을 받는다. ‘국군포로’는 북한 사회에서 영원한 반동분자로 남아있다.(유영복, 195쪽)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서 납북자 가족들은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납북자와 북한 억류 국군포로는 남북관계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인도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의 부인, 남한의 무관심

북한은 공식적으로 국군포로의 존재를 부인하고 ‘전쟁 시기 소식을 알 수 없게 된 자’라고 부른다.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 이후 한국 정부는 국군포로를 이산가족의 일부로 분류해 협의하기로 했다.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때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특수 이산가족’으로 분류해 만나도록 했다.

휴전협정상 명백히 ‘국군포로’이고 북한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이 많은 귀환 포로를 통해 확인됐는데 별다른 송환 노력이 없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초까지 군사정전위 등을 통해 송환을 요구했으나 북한이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자 사실상 손을 놨다.

북한 억류 국군포로들은 2000년 김대중-김정일 회담에 희망을 걸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 후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에 다녀왔지만 국군포로나 납북자는 거론되지도 않았고 한 명도 데려오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규정한 납북 피해자 17명을 귀환시키기 위해 북일 접촉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내세우는 것과 대비된다. 15명은 2002년 9월 고이즈미 총리의 평양 회담 직후 귀국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서도 3명의 미국 국적 억류자가 돌아왔다.

유영복 씨는 “북한이 (북한 억류 국군포로가 없다고) 억지 주장을 하니까 대화가 전혀 안 돼 하나도 안 데려왔다”며 “그럼 과연 유사시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최전방에 나가라 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이혜민, 87쪽)

탈북국군포로 김성태 씨(오른쪽)가 북한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승소한 뒤 소감을 밝히고 있다. 가운데는 박선영 물망초 이사장.

탈북국군포로, 김정은 상대 재판 잇단 승소

서울중앙지법은 2023년 5월 김성태(91) 씨 등 5명의 탈북국군포로가 북한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위자료 5000만원씩을 지급하라”고 승소 판결했다. 북한은 김 씨 등에게 강제노동을 시키며 억류한 반국가 단체로 북한의 행위는 고통을 준 불법행위라며 판결 이유를 밝혔다. 김 씨 등은 2020년 9월 소송을 함께 냈으나 소송이 오래 지연돼 3명은 작고하고 유영복 씨는 거동이 불편해 법정에 나오지 못했다.

앞서 서울중앙지법은 2020년 7월 한재복 씨 등 2명이 낸 소송에서 “북한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두 사람에게 각각 21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북한에 대한 한국 법원의 재판권을 인정하고 손해배상 명령을 내린 최초의 판결이었다.

미국 워싱턴DC 연방법원도 2021년 2월 1968년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해 23억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나포 당시 고문, 가혹행위 등에 대해서 승조원, 승조원 가족, 유족 171명에게 배상하도록 했다. 워싱턴DC 연방법원은 2018년 12월에도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가 풀려난 뒤 숨진 대학생 오토 웜비어 가족들에게 약 5억113만 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북한 여행 중 억류됐다 풀려난 뒤 사망한 오토 웜비어의 부모.

미국은 선박 몰수, 한국은 안면몰수?

한국과 미국에서 잇따라 북한을 상대로 한 배상 소송에서 승소 판결이 나오고 있지만 판결 집행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한재복 씨 등은 승소 금액을 받기 위해 국내 매체들이 북한 방송 영상 등을 사용하고 지불한 저작권료를 걷어 온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경문협)을 상대로 소송을 내 승소했다. 법원의 추심명령도 받아냈다. 그런데 서울동부지법은 2022년 1월 “경문협이 공탁한 저작권료는 북한 정부가 아닌 북한 작가 등의 소유”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한은 법적으로 권리 의무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권리능력이 없다고도 했다. 그런데다 고등법원은 경문협이 저작권료 지급에 관한 내용을 북한 측과 합의서에 명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추심 명령 집행을 신청한 한재복 씨 등의 신청을 각하했다.

소송을 대리하고 있는 구충서 변호사는 “북한의 저작권을 관리하는 기관은 정부 기관이고, 이 기관이 경문협과 계약으로 권한을 위임해 사실상 북한 정부의 소유인 저작권료를 배상금으로 할 수 있다”며 배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추심 집행 명령 소송은 대법원에 올라가 있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북한이 억류한 국군포로에 대한 강제 노역 등 행위에 대한 북한 당국이나 김정은의 배상에 대해 국내 법원에서 두 가지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법정에서 복잡한 법리 논쟁을 벌이는 사이 고령의 탈북국군포로 사망자는 늘어 2023년 8월 현재 80명의 탈북국군포로 중 12명만 남아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을 대상으로 한 배상 판결에서 승소한 뒤 배상 집행을 위해 북한 선박을 몰수했다. 오토 웜비어의 부모는 2019년 7월 법원에 북한 선박 ‘와이즈 어니스트’(Wise Honest) 호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몰수 소송 청구서를 제출했다. 이 선박은 북한이 보유한 두 번째로 큰 대형 화물선으로 고철값만도 300만 달러에 이른다. 그해 10월 뉴욕 남부연방법원은 해당 선박에 대한 몰수 판결을 내렸다.

대학 3학년이던 웜비어는 2016년 1월 북한 여행 중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 정치 선전물을 훔치려 했다는 혐의로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웜비어가 이듬해 6월 미국으로 돌아왔으나 귀국 6일 만에 사망하자 웜비어의 유족은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