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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7회]

미국 뉴욕주의 육군사관학교 ‘웨스트 포인트’ 교정의 맥아더 장군 동상. 출처 영문위키

중국 신화통신이 맥아더 사령관 해임 소식을 해임 이틀 후 전하고 있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 항미원조기념관 전시. 단둥 = 홍진환 기자

‘5성 장군 육군원수, 라디오로 해임 전해듣다’

1951년 4월 11일 오전 1시(미국 현지시간). 백악관 공보비서가 백악관에서 특별기자 회견을 갖고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의 해임을 발표했다. 시차가 있어 11일 오후가 된 도쿄의 라디오 방송은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맥아더 해임 소식을 긴급 뉴스로 전했다. 맥아더는 일본 점령군사령관이어서 일본에서도 큰 관심이었다. 방송을 들은 맥아더의 부관 시드니 허프 대령은 맥아더의 아내 진 맥아더에게 전화해 해임 사실을 전했다. 맥아더는 아내로부터 자신의 해임 보도를 전해 들었다. 모스크바와 베이징(北京)에서는 기쁨과 환희로 종이 울리고 축제 기분에 들떴다.(맥아더, 267쪽)

맥아더는 회고록에서 해임을 전해 듣게 된 경위를 자세히 소개했다. 얼마나 갑작스럽고 어이없게 자신의 해임이 이뤄졌는지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군인이 해임되는 것은 큰 불명예임에도 한 번의 해명 기회도 주지 않고 자신을 해임한 것에 대해 후에 격렬히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초 애치슨 국무장관이 무초 주한대사에게 명령서를 전문으로 보낸 뒤 마침 방한 중인 페이스 육군장관이 도쿄로 가서 직접 전달해 예우를 갖출 계획이었다. 그런데 시카코의 한 언론이 11일 조간으로 보도할 것으로 알려져 부득이 긴급 발표하게 됐다고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설명했다.(트루먼, 424쪽)

 “트루먼 탄핵하라”, 여론의 분노
 
많은 미국인들은 맥아더의 해임 소식에 항의해 전국에서 트루먼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국제부두 노조는 항의로 조업을 중단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공항에서 도심까지 늘어서 환영했다. 뉴욕에서는 70만 시민이 종이 꽃가루를 뿌리며 영웅을 맞았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아이젠하워 장군 귀국 환영 인파보다 2배는 많았다.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66%가 맥아더의 해임에 반대했다.

시사주간 타임은 “인기가 많은 사람이 그보다 훨씬 인기가 없는 사람에 파면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다” “트루먼은 전형적인 소인배”라는 논평을 냈다.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부통령을 지낸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즉시 맥아더를 복귀시키라”고 주장했다.(핼버스탬, 938쪽). 맥아더에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퇴임 연설을 하고 해임 경위를 따지는 의회 청문회도 열기로 했다.(‘미래한국’, 2015년 4월 10일)

맥아더가 해임되자 일본은 천황이 직접 방문해 작별 인사를 했다. 일본과 한국 국회는 감사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을 위해 했던 일과 우정을 베풀어준 것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라며 “시간이 지나면 세계 역사상 탁월한 지도자 및 정치가로 더욱 빛날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맥아더가 일본을 떠난 4월 16일 2백만 명의 시민이 미 대사관에서 아츠키 비행장까지 길에 늘어섰다. 맥아더를 태운 비행기는 후지산을 한 바퀴 돈 뒤 미국으로 향했다.(맥아더, 269쪽)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해임은 문민우위 헌법 수호 차원’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맥아더 육군원수가 공적인 직무와 관련된 문제에서 미국 및 UN의 정책을 성심껏 지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 사령관이 법과 헌법에 의한 정책 및 명령에 의해 통할되는 것은 기본 원칙이다. 그가 나라에 바친 탁월하고도 유례없는 공헌에 깊은 감사의 뜻을 가지고 있어 해임 조치를 다시 한번 유감으로 생각한다.”

트루먼은 그가 명령에 따르지 않아 해임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히 했다.

당시는 중공군의 4차 대공세 이후 약 2개월간의 ‘휴지기’였다. 하지만 곧 중공군이 70만 명을 동원한 ‘1차 춘계 대공세’를 벌이기 직전으로 6·25 전쟁은 급류속이었다. 그런데 16개국 UN군 수장이기도 한 장수를 전격 경질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해임 발표가 나오기 나흘 전인 4월 7일 국무부 국방부 합동참모본부의 간부 등이 모인 회의에서 맥아더 해임에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다. 심지어 이미 2년 전 극동군사령관 등에서 해임되어야 했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트루먼에게 보고했다.

‘맥아더 해임’은 한국전쟁 수행 방식의 이견 때문만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수면 아래에서 잠재되어 있었다. 6·25 전쟁의 작전 범위를 둘러싼 이른바 ‘확전론’과 ‘제한론’의 갈등에서 임계치를 넘어 폭발했던 것이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 미국군 전승 충혼비. 지평리 전투는 중공군의 인해전술이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고 유엔군이 반격하는 전환점이 됐다. 그해 7월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양평 = 구자룡 기자

트루먼의 휴전 의지 정면 거부한 맥아더

트루먼 행정부에서 맥아더 해임은 휴화산이었지만 해임 결단 이전 보름 남짓 기간에 벌어진 두 사건이 트루먼의 표현대로 ‘선을 넘은’ 계기가 됐다. 해임을 불러온 마지막 두 개의 폭탄이었다.

첫째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휴전협상 의지를 정면으로 거스른 3월 24일의 성명. 트루먼은 3월 중공군에 대한 반격작전인 ‘리퍼 작전’ 성공으로 기세를 잡았다고 보았다. 공산군측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없게 느끼는 이 때가 휴전협상 타이밍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맥아더는 전쟁은 외교보다 군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의 성명은 이랬다. “적의 인해전술은 우리 군대가 익숙해져 쓸모없게 되었다. 중국의 생산기반과 원료로는 중등 정도의 공군과 해군을 편성 유지하는 것도 부족하다. 대량파괴수단의 발전으로 단순한 병력수만으로는 약점이 만회되지 않는다. 군사작전을 중공 연안과 내륙기지까지 확대하면 중공은 군사적인 붕괴 위험을 면치 못할 것이다.”(트루먼, 416쪽)

밀리는 적을 확실히 밀어붙이고 중국 대륙까지 확전하자는 것이었다.

트루먼은 공산군이 38선 이북으로 후퇴한 뒤 평화적인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선언 초안을 준비해 참전국과 맥아더에게도 보냈었다. 맥아더의 성명은 휴전을 거부하는 확전 위협으로 간주됐다. 국무부는 우방국에 맥아더의 회견은 워싱턴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단적인 것이었다고 해명해야 했다.(김계동, 281쪽)

트루먼은 회고록에서 분개했다.

“외교정책에 관한 어떤 발언도 삼가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전적으로 무시한 행동이었다. 대통령이며 최고사령관인 나의 명령에 공개적으로 불복하는 것이었다. 이는 헌법에 따른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도전이자 UN의 정책을 우롱하는 것이었다. 맥아더는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나는 그의 불복에 더 이상 관용을 베풀수가 없었다.”(트루먼, 417쪽)
그는 맥아더의 성명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말밖에 표현할 길이 없으며 미국의 전통적인 문민우위에 도전하고 있는 이유를 생각해 내려고 애써 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맥아더를 용인하면 문민우위의 헌법을 수호하겠다고 한 서약을 위배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루먼에게 맥아더 해임은 헌법을 수호하는 일이 되어 버렸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