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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군번 계급없는 영웅! 학도의용병(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소년병

전쟁에서 전사 부상으로 병력 소모가 늘어나면서 병력 보충이 시급해지자 학도병은 물론 소년병도 자원이나 모집을 통해 전선으로 보내졌다. 전국에서 모인 소년병 부대는 1950년 8월 초 기계 안강전투에서 국군 25연대에 배속돼 북한군을 격퇴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당시 전투는 소년병이 도착해도 명단을 작성할 겨를도 없이 전선에 배치돼 누가 전사하고 후송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급박했다고 한다.(‘1129일간의 전쟁’, 609〜617쪽)

‘소년병’은 징집 연령인 18세 미만으로 주로 12~17세 청소년들인데 이들에게는 군번이 부여됐다. 군번이 부여되지 않은 학도병은 정부의 학교 복귀령에 따라 돌아갔다. 그런데 더 어린 소년병은 군번이 부여돼 정식 군인 신분으로 편입됐기 때문에 군 생활을 계속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된 뒤에도 전역하지 못해 5~7년간 더 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전쟁 기간 소년병은 2만7천여명이 참전해 2570여명이 사망했다. 이들은 국가유공자로서 보상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의 ‘형제의 상’ 전투에서 국군과 북한군으로 만난 형제를 형상화했다. 구자룡 기자

길거리에서 징병관에 의해 모집되기도 한 소년병은 기차를 타고 가면서 6시간가량 훈련을 받은 후 바로 전투에 투입되기도 했다. 길거리에서 징병되어 가면서 가족에게 알리지도 못한 경우도 있다. 소년병 중에는 여성들도 있었다. 낙동강 전투시 주변 학교 여학생들이 행정병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북한군에 의용군으로 붙잡혀 가면서 전투에서 형제가 국군과 북한군으로 나뉘어 전투를 벌이는 그야말로 동족상잔이 벌어졌다.


▼ 카투사(KATUSA)

국군은 1950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합의에 따라 미 지상군의 병력보충을 위해 카투사(KATUSA·Korea Augmentation to the US Army) 제도를 시행했다. 당시 일본 주둔 미군은 감소 편성되어 있는데다 전선에 투입된 이후 많은 전투력 손실이 발생했다. 육군본부는 8월 16~24일 8600여 명 카투사를 1차로 선발해 도쿄의 미 극동군사령부에 보냈다. 8월 20일부터는 한국에서 전투 중인 각 사단에도 각각 250명을 보냈다. 카투사는 경계, 정찰, 진지구축, 방어진지 위장 등의 보조임무를 수행했다.(김철수, 130쪽)

훈련 중인 카투사 부대원들. 출처 영문위키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에 투입

1950년 8월 16일 최초의 카투사 313명이 부산항에서 요코하마로 떠났다. 8월 24일까지 8623명의 카투사가 당시 일본에서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이던 미 육군 제 7사단에 급하게 보충되었다. 그들은 겨우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초기에는 피난민들이 몰려있던 대구와 부산 등에서 불심검문을 통한 강제징집이 실시되었다. 피난민 숙소를 급습해 자고 있던 장정들을 골라내는 이른바 ‘토끼몰이’ 방식도 있었다. 미리 준비한 M1 개런드 소총을 어깨에 메고 섰을 때 소총 개머리판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의 키만 되면 징집대상으로 분류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처음 출발한 카투사 313명 중에는 부인을 위해 약을 구하러 나섰다 끌려온 유부남부터 책가방을 든 15세 중학생도 있었다. 이들은 배 위에서 입영명령서를 스스로 작성했다. 일본 요코하마항에 도착해 후지산 기슭 미 7사단 훈련소로 갔다.(문관현, 182쪽)

한국전쟁 기간 전체 카투사 4만3660명 중 6415명이 전사해 전사율 14.7%로 미군의 전사율 2.2%보다 7배 가까이 높았다. 북한군은 카투사를 붙잡으면 ‘미제의 앞잡이’라며 더 가혹한 대우를 서슴지 않았다. 2012년 62년 만에 북한에서 돌아온 용사들의 유해 12구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 전투단에 배속돼 장진호 전투에서 싸웠던 약 800명의 카투사 중 일부였다.(애플먼, 역자 서문)

‘장진호 동쪽’에 투입된 미 7사단 31연대에 ‘뻐꾸기 대대’로 편입된 32연대 1대대는 캠프 맥네르에서 500명의 카투사를 받았다. 대대가 장진호에 도착했을 때는 약 300명으로 줄어 있었다. 카투사는 3개 소총 중대에 각각 45명에서 50명이 할당되었다. 이들은 중대병력 숫자의 약 4분의 1을 구성했다. 그런데 미군 분대장들이 한국군 분대원과 만족스럽게 소통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장진호 동쪽 전투 시 이같은 소통부족은 큰 장애가 되었다.(애플먼, 84쪽)

정전 협정 이후에도 지속

카투사 제도가 도입된 것은 낙동강 방어선이 북한군에게 거의 돌파되려는 그야말로 벼랑 끝에 서있던 시기였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7사단은 한국에서 전투 중인 미군 3개 사단에 초급 보병장교와 하사관, 경험있는 소총수들을 채워주는 보충부대 역할을 수행했다.

무초 주한 미 대사는 일찍이 한국군 정규 병력을 미군 부대에 배속할 것을 제의하였다. 한국군을 주일미군 기지에서 훈련시킨뒤 미군과 한국군 1명씩 짝을 지어 작전을 수행하는 이른바 ‘버디 시스템’(Buddy System)까지 구체적으로 제안하였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미군부대 한국군 배속 방안을 건의한 것이었다. 그러다 ‘카투사 제도’로 공식화되었다. 카투사 제도는 정전협정 이후에도 부족한 미군 병력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존속하고 있다.

워리어 베이스의 임진스카웃 대원들. 출처 영문 위키

 ‘임진스카웃’ 활동
 
1960년대와 70년대 북한의 도발이 최고조로 올랐을 당시 카투사들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2사단의 특수부대인 ‘임진스카웃’ 정찰대에 편성되어 북한군과 근접 전투를 수행했다. 카투사와 한국군 장교로만 이루어진 ‘임진스카웃’은 미군 2사단에 배속된 대간첩중대(CAC)였다.

임진스카웃은 1965년 9월 경기 파주에서 처음 결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군 침투 등 충돌이 많을 때는 미 2사단의 첨병으로 활동한 ‘전투 보병의 꽃’이었다고 한다. 임진스카웃과 북한군 특수8군단은 창과 방패처럼 맞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임진스카웃은 1991년 10월 한국군 1사단에 비무장지대 서부전선 경계 임무를 넘겨주고 26년만에 사라진 뒤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러다 2002년 6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경비대대가 임진스카웃 배지 착용과 인증서 수여 등 일부 임진스카웃 제도를 부활시켰다.(문관현, 11쪽)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문관현 지음, 『임진스카웃』, 정음서원, 2022.
로이 E. 애플먼 지음, 허빈 옮김, 『장진호 동쪽-4일 낮 5일 밤의 비록』, 다트앤, 2013.
『6·25전쟁 학도의용군 연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
『1129일간의 전쟁 6·25』,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2014.
『포항전투사 – 끝나지 않은 전쟁 6·25』, 학도의용군 포항지회.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