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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는 왜 전쟁 중 해임됐나(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1944년 10월 20일 필리핀 레이테섬 팔로 해변에 상륙하는 맥아더. 태평양 전쟁과 일본 점령군사령관, 한국 전쟁의 유엔군 사령관 등을 거쳐 해임이후 미국으로 돌아간 것은 14년 만이었다.

“일개 장교가 극동의 황제가 되려는 것 용납할 수 없다”

휴전 노력에 반대하는 맥아더의 불복 사태 처리에 고심하던 트루먼에게 ‘마틴 편지 사건’이 터져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4월 5일 야당인 공화당 하원 원내총무 조지프 마틴은 하원에서 맥아더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라며 공개 낭독했다. 대만 장제스(蔣介石) 정부를 지지하는 마틴이 2월 12일 하원에서 했던 “장제스 군대가 한국전에 사용되지 않은 것은 바보스러운 결정”이라는 발언에 대한 맥아더의 코멘트였다. 맥아더가 3월 20일 마틴에게 보냈던 것이었다.

“귀하의 견해는 논리적으로 모순되지도 않고 전통에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는 외교관들이 입으로 싸우지만 여기서는 무기로 싸우고 있습니다.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패하면 유럽도 몰락이 불가피하다는 것, 여기서 이기면 유럽의 자유를 보존하게 되리라는 것 등을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이 보입니다. 승리 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맥아더, 253쪽)

트루먼은 승리도 올바른 승리와 그릇된 승리가 있는데 맥아더가 마음에 두는 중국 폭격에 의한 승리는 그릇된 승리라고 했다. 그는 나폴레옹이 모스크바 침공 기간 중 “나는 싸움마다 모두 격파했으나 어느 한 곳도 얻지 못했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하나의 전장에서의 승리는 그 자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트루먼, 422쪽)”

맥아더의 편지가 공개된 날 트루먼은 일기에 “맥아더가 또다시 정치적인 폭탄을 터뜨렸다. 아무래도 이번이 마지막 일격이 될 것 같다. 누가 봐도 확실한 불복종에 해당한다. 극동지역 고집불통 장군을 본국으로 불러들여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적었다.(핼버스탬, 929쪽)

트루먼은 후에 사적인 자리에서는 더욱 격렬한 어조로 맥아더를 비난했다. “문제는 그가 식민지 총독, 즉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 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핼버스탬, 935쪽)
4월 9일 미 합참은 맥아더 해임을 건의하고 트루먼은 4월 11일 민간 및 군부참모들의 만장일치 지지로 해임 결정을 내렸다.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기념관 앞의 동상. 웨스트포인트의 것을 그대로 본떠 제작됐다. 기념관에는 맥아더 자료를 담은 타임캡슐도 있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트루먼과 맥아더의 오랜 신경전
 
지휘 계통으로만 보면 군통수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은 수차례 맥아더를 해임 혹은 경질할 수도 있었다. 태평양 전쟁의 영웅이자 높은 여론 지지를 받는 맥아더는 ‘전쟁에서는 내가 옳다’며 독자적인 행동을 하면서 갈등이 누적됐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같은 전과(戰果)가 맥아더를 ‘언터처블’의 지위를 갖게 했다.

#1. 6·25 전쟁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를 참여시키는 문제를 두고 이견을 보인 가운데 1950년 7월 31일 맥아더가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의 중국 본토 공격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자 “미국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대만에 대한 군사적 폭력 행위를 방지하는 문제로 대화가 국한됐다”는 특별성명을 발표하며 무마해야 했다.(맥아더, 180쪽)

그는 회고록에서 이 방문 여파로 자신이 해임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는 “일본과 싸울 때는 장제스와 손을 잡으면서 공산당과 싸울 때는 왜 손을 잡지 않냐”고 불만을 나타내고 “내가 공직에서 추방되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것은 분명했다”고 적었다.(맥아더, 185쪽)

#2. 맥아더가 1950년 8월 24일 미 해외참전군인회(VFW)에 보낸 메시지도 대만 문제로 트루먼과 갈등을 빚은 대표적인 사례다. 맥아더는 “대만은 ‘가라앉지 않는 항공모함’으로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전진 교두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대만 방어를 반대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유화주의자’라고 비판했다.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를 해임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애치슨도 당시 맥아더의 메시지는 “‘이 나라의 대통령은 누구냐’하는 것에 대한 문제”라며 대통령에 대한 항명이었다고 했다.(애치슨, 550쪽)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맥아더 기념관의 맥아더와 부인 진의 무덤. 출처 맥아더기념관 홈페이지

트루먼의 ‘언론 금족령’도 무시

트루먼은 1950년 12월 5일, 해외 주재 외교관들에게 군사문제나 외교정책에 관해 미국의 언론기관과 직접 접촉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특정인을 지목한 것은 아니지만 맥아더를 겨냥한 것이었다.

앞서 12월 1일 맥아더는 ‘US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와 인터뷰에서 만주 국경지대의 공산군을 폭격할 수 없어 UN군은 군의 역사상 전례가 없이 엄청난 핸디캡을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는 사실상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직격이었다. 이 때도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어야 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맥아더의 ‘언론 플레이’가 계속되자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른 트루먼이 선택한 카드가 ‘언론 금족령’이었으나 맥아더는 개의치 않았다.

1951년 1월 29일 영국 ‘텔레크라프’와의 인터뷰에서 “아시아의 자유를 위한 전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언해 당시 휴전을 모색하고 있던 트루먼 정부를 당혹스럽게 했다.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만난 트루먼과 맥아더

트루먼과 맥아더, 웨이크섬 신경전

중공군이 참전하기 직전인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열린 트루먼과 맥아더의 회담은 ‘맥아더의 중공군 불참 오판 발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공군이 참전할 가능성이 적고 참전해도 소수에 그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회담은 ‘맥아더가 늦게 도착해 트루먼 대통령을 기다리게 했다’는 가짜뉴스까지 나올 정도로 두 사람의 기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먼저 회담 장소. 당초 호놀룰루가 지목됐으나 맥아더가 ‘전쟁 중 오래 도쿄 본부를 비우는 것이 곤란하다’고 주장해 워싱턴에서는 1만2000km, 도쿄에서는 4800km 떨어진 웨이크섬으로 결정됐다. 백악관 실무자들이 ‘국왕이 왕자를 만나러 가는 법이 어디있냐’고 반대하기도 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외국의 군주처럼 행세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며 불참했다.(핼버스탬, 555쪽)

그럼에도 트루먼이 맥아더를 만나러 간 이유는 뭘까. “(재선까지 대통령 임기 6년째인데)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잠깐 (워싱턴에) 다녀가라 해도 오지 않아 유감이었다.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위협에 대한 소식도 궁금했다.”(트루먼, 339쪽)

사령관에게 전쟁 현황을 들으려는 것도 있지만 트루먼이 한 달도 한 남은 중간선거에 ‘전쟁 영웅 맥아더’의 후광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 맥아더도 “회담이 무슨 목적으로 열렸는지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간선거가 다가오고 있어 대통령은 회담 목적이 자기 정당을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결부시키는 데 있었던 것 같다”며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고 보았다.(맥아더, 216쪽)

트루먼은 중공군에 대한 맥아더의 견해를 듣는 것이 회담의 주요 관심사였다고 강조했지만 맥아더는 회담이 끝날 때쯤 잠깐 언급했다고 했다. 트루먼은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음을 부각하려 한 반면 맥아더는 주요 화두가 아니었음을 강조한 회고록에서도 신경전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