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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9회]

경기 파주 임진각의 미 187공수연대 한국전쟁 참전비. 1950년 10월 20일과 21일 순천 석천에서 전투 낙하했다고 기록했다. 파주 = 홍진환 기자

1950년 10월 20일 평양 북쪽 순천 숙천 하늘은 낙하하는 미 187공수연대 낙하산으로 덮혔다. 미군은 낙하산으로 병력 뿐 아니라 중화기도 투하해 사용했다.

지형 고려 안한 북진 목표 ‘신 맥아더 라인’

백선엽의 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입성 경쟁을 벌였다. 차량을 이용한 미군이 하루 18km 진격한 반면, 1사단은 도보로 하루 25km를 올라가 10월 19일 정오 1사단이 먼저 평양 시내에 들어갔다. 백선엽은 당초 평양 진공 계획에 유엔군만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평양이 고향이다’며 밀번 미 1군단장을 설득해 평양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평양 진입 다음날 평양 북쪽 숙천, 순천 등에 미 187공수연대 4000여명을 투입하는 공수작전이 실시됐다. 하늘이 낙하산으로 시꺼멓게 덮였다. 퇴로를 차단한 뒤 포로와 납치 인사 구출, 도주하는 김일성 등 북한 지도부 포획 등이 작전 목표였다. 1만5천명으로 예상했던 북한군은 이미 청천강을 건너 3800여명이 포로로 잡혔다. 김일성은 1주일 여 전 빠져나간 뒤였다.
공수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비행기를 타고 낙하 현장 상공에서 지켜봤다. 맥아더를 수행한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사령관은 “맥아더의 대담함과 용기, 작전의 시의적절함, 조직력, 행동 등 다시 한 번 훌륭한 지도력을 보여주었다”고 극찬했다.(스트레이트마이어, 10월 20일자 일기). 27일 이승만 대통령은 10만 인파가 모인 평양시민환영대회에서 연설했다.


평양 점령 후 맥아더 사령관은 새로운 북진 목표로 가까운 곳은 압록강까지 60km 가량 남겨놓은 선천~성진을 잇는 ‘뉴 맥아더 라인’을 선포했다. 38선을 넘은 직후 제시한 정주~영원~함흥을 잇는 ‘맥아더 라인’보다 30~110km 위다. 문제는 지형 검토없이 북진 목표만 올린 것이다. 한반도 지형에서 평양과 원산을 잇는 평원선의 방어 폭은 270km 가량이다. 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에 가까워지면 방어 폭은 765km로 3배 이상 길어진다.(백선엽 1권, 107쪽)

유엔군의 평양 점령 직후인 1950년 10월 27일 열린 평양시민 환영대회에 이승만 대통령을 환영하는 문구가 걸려 있다.

전황 낙관과 오판

평양 탈환 이후 미 제1 기병사단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탄약 반납 지시도 있었다. 평양 탈환 사흘 후인 10월 22일 워커 사령관은 맥아더에게 “20일 이후 한국에 도착하는 탄약 수송선을 다시 일본으로 돌려보내라”고 요청했다. 맥아더는 105mm와 155mm 포탄을 심은 함선 6척을 하와이로 보내라고 했다. 미 2사단장은 10월 25일 참모 회의에서 “크리스마스 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일부 미군 장병들은 도쿄 백화점의 크리스마스 선물 목록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귀국길에 가족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서였다.(핼버스탬, 34쪽).
트루먼은 당시 맥아더가 얼마나 전황을 (터무니없이) 낙관했는지 기록없이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저항은 추수감사절까지 분쇄될 것이다. 크리스마스 때까지 미 8군을 일본으로 철수할 수 있다. 미 2개 사단과 유엔군 다른 부대들은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한국에 주둔시키겠다. 빠르면 이듬해(1951년) 1월 총선거가 실시될 수 있다.”(트루먼, 342쪽). 낙동강 방어선에서 쫓겨 올라온 북한군은 아무런 저항을 못하고 중공군 참전이 확인되기 직전 ‘폭풍 전야’ 같은 시기에 대한 맥아더의 인식이었다.


지휘권 2원화로 동서부 전선 ‘80km 빈틈’

“시속 125마일 속도로 상륙함대 쪽으로 접근하던 태풍 케지아가 동쪽으로 비켜가 운명의 여신은 맥아더의 편이었다. 인천에서는 큰 행운이 있었지만 압록강으로의 진격이라는 불가능한 기회로 나아가게 됐다.”
애치슨은 인천 상륙이후 맥아더의 ‘과속 북진’ 우려를 이렇게 나타냈다. 실제로 38선을 넘은 맥아더는 전략 전술 작전 정보 등 여러 분야에서 실책 혹은 아쉬움을 남기는 조치들을 잇따라 취했다. 특히 북진 작전 지휘권 2원화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면서 서부전선은 워커의 미 8군 사령관, 동부전선은 상륙작전을 수행한 아몬드 소장의 10군단으로 나눴다. 10군단은 도쿄사령부 직속으로 두었다. 상륙작전을 반대한 워커에게서 10군단을 떼어내 지휘권을 둘로 나누고 북진 경쟁을 유도했다.
워커는 전선 시찰을 나온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에게 “같은 전선에 두 명의 지휘관이 있을 수 없다. 나를 택하든 아몬드를 택하든 하라”고 사실상 항명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던 12월 3일의 일이다.(정일권 143쪽). 미 10군단은 장진호 전투 이후 리지웨이가 8군 예하로 통합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