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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1)[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9회]

‘1950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인민군 복장으로 바꿔입은 6사단 20여명 특공수색대가 소련제 소형트럭을 타고 압록강을 향했다. 북한군 검문소를 만나면 104 탱크부대 소속 장교들이라고 속이고 통과했다. 고장(古場)에서는 북한군 소장 계급의 고사포여단장을 생포해 앞세우고 갔다. 압록강이 있는 초산에 도착한 뒤 주민들에게 국군이라고 신분을 밝히자 허리춤에서 태극기를 꺼내서 ‘국군 만세’를 외쳤다.(정일권, 209쪽)
정일권 당시 육참총장이 후에 6사단장을 맡은 장도영 장군에게 들은 것이라며 소개한 압록강 첫 도달 장면이었다. 당시 6사단장은 김종오였다.

국군 6사단 7연대 장병들이 압록강변에 태극기를 게양하고 감격의 눈물을 흘린 것은 1950년 10월 26일 오후 2시경.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병사의 사진 한 장은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을 상징했다. 그날 밤 장병들은 초산에서 밤을 지내며 ‘가거라 38선’ 등 노래를 불렀다. 6사단은 매년 ‘압록강 진격 기념식’도 갖는다. 하지만 ‘압록강 수통’의 기쁨은 다음날부터 참혹한 패전과 후퇴로 이어졌다. 중공군은 깊숙이 들어와 매복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내달은 맥아더의 유엔군은 중국 만주폭격까지 고민했지만 중공군 참전으로 꽁무니를 빼듯 후퇴해야 했다.


‘인천상륙 성공 여세 몰아 38선 돌파’

“미군의 참전 목적은 북한군 패망이지 단순히 38선 이북으로 격퇴시키는 것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을 벌이기 전부터 이런 결의로 한국에 온 맥아더에게 서울 탈환 뒤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김계동 132쪽). 맥아더와 많은 부분 견해를 달리했던 애치슨 국무장관도 1950년 8월 하순 상륙작전을 앞두고 “유엔군이 38선을 넘을지 말지 논란은 전혀 불필요하다”고 했다. 군대 움직임은 측량사가 설정한 선을 따라 진격하고 정지할 수 없으며 실제 군사 상황에 맞게 목표는 다시 설정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애치슨, 577쪽)
미 합참은 서울 탈환 하루 전인 9월 27일 “‘38선 이북에서 지상작전을 해도 좋다. 단 어떤 부대도 중국과 소련 국경을 넘어서는 안된다. 한국군 이외의 군대를 만주 국경에 진격시켜서도 안된다”고 했다. 맥아더는 38선을 넘은 뒤 작전 반경에 많은 제한을 두는 것에 불만을 나타냈다.


이승만 “북진하라!” 국군에 친필 명령

“대한민국 국군은 대통령의 명령을 충실히 따르라” 이승만은 1950년 9월 30일 부산 경무대에서 군 지휘관을 소집, 비록 작전지휘권은 7월 유엔군에 넘겼지만 ‘국군은 즉각 북진하라’는 친필 명령을 내렸다. 이승만은 북진 논란에 “도둑을 쫓다가 울타리가 있으니 그만두라는 격”이라고 일갈했다. (정일권, 156쪽)
김백일 1군단장은 10월 1일 오전 북진명령을 내렸다. 국군이 38선을 넘은 10월 1일은 국군의 날로 정해졌다. 1군단 예하 수도사단과 3사단이 38선을 넘은 뒤 원산 입성을 두고 선두 경쟁을 벌여 10일 오전 거의 동시에 원산을 탈환했다. 인천상륙에 성공한 뒤 낙동강 방어선에서 올라온 미 8군을 오산에서 랑데뷰한 미 10군단은 다시 인천을 통해 바다로 나가 한반도를 돌아 원산에 상륙하도록 했다. 미 10군단 예하 해병 1사단은 멀리 남해안을 돌아온데다 원산 앞바다에 부설해 놓은 3천여기의 기뢰를 제거하느라 1주일 가량을 원산과 울릉도를 오가며 시간을 보내다 10월 26일 원산에 ‘행정상륙(전투없이 행정처리 하듯 상륙)’했다. 미군들은 원산 앞바다에서 요요작전을 하는 것이라고 불렀다.(러스, 38쪽) 미 7사단은 원산에 상륙하지 않고 더 북쪽으로 올라가 10월 28일 이원에 상륙했다.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