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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맥아더의 ‘무사안일’ 북진(北進)과 호된 대가(3)[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야외에 6·25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장비와 같은 기종을 전시해 놓고 있다. 앞쪽에 ‘중국인민지원군’ 표시가 보인다. 단둥 = 홍진환 기자

지휘가 2원화돼 동서부 전선에 약 80~100km의 틈이 벌어졌다. 산악지대가 많은 북쪽 지형 때문에 통신도 안되는 등 서로 경쟁적으로 북진하던 8군과 10군단 사이에 소통이 안됐다. 애치슨은 “중간에 큰 공간이 생겨 측면이 적군에게 노출됐는데 도쿄 사령부는 30시간이 지난 뒤에야 입수되는 정보를 기초로 조정 지시를 내렸다”고 했다.(애치슨, 603쪽).
심각한 것은 중공군 지도부가 이런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는 점이다. 베이징(北京)이 10월 21일 지원군사령부에 보낸 전보에서 “미국과 국군은 지원군(중공군 의미)이 참전하리라 생각을 못하고 감히 동서 두 길로 나뉘어 마음 놓고 전진하고 있다”며 전선 사이를 파고들어 적을 나누어 포위한 뒤 각개 격파할 좋은 기회라고 지시했다.(훙쉐즈, 80쪽)

중국 단둥의 항미원조기념관 야외에 6·25 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 장비. 단둥 = 홍진환 기자

정보부족, 위험신호 무시, 안일한 자세

평양 탈환 후 북진하던 제1기병사단 8연대의 허버트 밀러 중사는 운산에서 늙은 농부를 만났다. “중공군 수천 명이 있으며 상당수가 말을 타고 왔다”고 알려주었다. 농부를 대대까지 데려갔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중공군과 아군의 첫 전투인 운산 전투(10월 25일~11월 3일) 직전의 일이다.(핼버스탬, 37쪽).
미군과 국군은 초산과 운산 전투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전투에서 붙잡힌 중공군 포로들이 대규모 참전 사실을 털어놓았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소홀히 취급하고 무시했다. 일개 병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라는 것도 한 이유다. 중공군은 1차 공세(10월 25일~11월 5일)후 모습을 감췄는데 치고 빠지는 중공군의 전술을 알지 못한 것도 맥아더가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대한 오판에 영향을 주었다. 워싱턴 지도부도 중공군이 참전한다해도 압록강 연안의 수력 발전소 등을 보호하기 위한 완충지대 확보 목적이라고 봤다. 내전이 끝나고 공산당 정부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미국과 전쟁을 벌일 여유도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을 무시하고 무모하게 북진했다는 비판에 대해 자신도 정보부재 속에서 작전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압록강 건너 중공군의 의도가 무엇인지 총력을 기울여 참전하기로 한 것인지 물어도 워싱턴은 회답이 없었다고 주장했다.(맥아더, 227쪽)

인천 연수구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의 맥아더 흉상. 밑에 영문과 중국어 표기가 병기되어 있다. 인천 = 구자룡 기자

맥아더, 중공에 대한 무지와 오만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빛을 바래게 하는 맥아더의 잇단 중공군 대응 부실을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왔다. 먼저 무지와 오만이다. 워커 후임 8군 사령관 리지웨이나 마셜 장군 등은 중국 근무 경험이 있어 중공군에 대한 이해가 있었지만 맥아더는 한 번도 중국에 가보지 않았다. 필리핀 등에서 오래 머문 그의 머릿속 중국 대륙은 19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마오쩌둥(毛澤東)이 어떤 방법으로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는지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공군력을 과신했다. 공습을 받으면 발이 묶이고 기동성이 떨어진 일본군과 달리 야간에 엄청난 속도로 기동하는 중공군은 상황이 달랐다. 이런 중공군에 대한 무지가 맥아더의 오판과 실수를 불렀다는 것이다.(핼버스탬, 567쪽).
10월 15일 태평양의 웨이크섬에서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가능성에 대해 “거의 없다. 중국은 만주에 30만, 그중 압록강을 따라 10만~12만 5천 명 정도가 배치되어 있다. 그 중 5만 내지 6만 명 정도가 넘어올 수 있지만 그들은 공군이 없다. 밀고 내려오면 대살육이 벌어질 것이다”고 자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을 만났을 당시 중공군 2개 야전군(18개 사단)이 이미 만주로 이동했다는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부인한 것은 중공군이 참전한다고 하면 미국내 반전 여론을 부추길 수 있고, 참전 가능성을 부인해야 중공군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다.(정일권, 223쪽)
하지만 맥아더는 후에 회고록에서 자신의 정보부가 만주와 압록강 연안에 대부대가 집결되어 있는 것은 파악했으나 그들의 저의는 알 수 없다고 보고했다는 것이다.(맥아더, 214쪽). 이승만은 유엔군이 철수하지 않고 아직 한반도에 있을 때 중공군이 참전한 것이 다행이라고 봤다. “하나님이 한국을 구하려는 방법인지 모른다”고까지 했다. 철수한 뒤 참전했으면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유다.(프란체스카, 11월 29일자)

북한 공군 주력 기종 야크-9. 소련은 전쟁 당시 100여대를 제공했다.

맥아더, 공군력 제한에 대한 불만

맥아더는 공군력 제한으로 만주와 시베리아가 적 병력의 절대적인 안전지대로 변해 적이 아무리 괴롭혀도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것은 문제라고 불만을 나타냈다.(맥아더, 218쪽)
맥아더는 11월 7일자 전문에서 “작전 제한으로 한만국경을 넘나드는 적 공군기에 완전한 성역을 마련하여 주고 있다. 이래서는 아군의 사기와 전투능률에 미치는 영향은 중대하다” 고 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군사적 판단은 존중하지만 대통령으로서 군사적인 판단 이상의 것을 경청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회신했다. 소련은 미국이 아시아의 전쟁에 더욱 깊이 개입해 유럽에 눈을 돌릴 틈이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 트루먼의 판단이었다.(트루먼, 354쪽)
맥아더의 북진 실패에 대해 인천상륙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에 도달하는 신속한 북진이 이뤄졌으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영웅의 한 명이 됐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38선 돌파를 머뭇거려 공군지원이나 포병 화력도 없는 농민군(중공군 지칭)에 기선을 제압당했다는 것이다.(러스, 284쪽) 국군이 10월 1일 38선을 넘은 뒤 미군은 9일에야 넘었다.

맥아더의 북진과 후퇴에 대한 해명

“우리의 북진으로 적들은 시간이 어긋나서 예정보다 일찍 행동을 개시해야 했다. 그 결과 봄까지 대병력을 집결시켜 일거에 우리를 괴멸시키려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북진하지 않았다면 가만히 앉아서 섬멸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규모 중공군 참전이 확인된 후 후퇴한 것에 대해 “중공군에 대항하려면 아군 병력을 적어도 3배로 늘려야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속하게 후퇴해 적의 보급선이 길어지도록 해 공격하기 쉽게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맥아더, 228쪽)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