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논문
제목[변영욱] 인민의 모습과 노동신문의 인스타그램화
■북한 이미지 정치 리포트 2025년 10월
● 김일성광장에서 펼쳐진 야간 기념식과 감정에 호소하는 스펙타클
2025년 10월 10일 밤, 평양 김일성광장은 노동당 창건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여한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수십만 명의 군중이 인공기와 꽃을 흔드는 가운데,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 20형’ 등 무기와 군인들이 비를 맞으며 행진했다. 비가 들이치지 않는 주석단에서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러시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과 중국의 리창 총리 등 11개국 대표단이 서 있었다.
조선중앙TV는 다음 날 오후 4시부터 1시간 55분에 걸쳐 전날 밤 10시에 열린 이 열병식을 녹화 중계했다. 생방송보다는 보여줄 것만 보여주고 실수하는 장면을 가릴 수 있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북한은 2017년 4월 김일성 생일 105주년 기념 열병식 이후로는 TV 생중계를 하지 않고 있다.
수십 대의 카메라, 로봇, 드론이 동원된 촬영은 장엄한 음악과 함께 편집되어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완성됐다. 북한 내부와 외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짧은 하이라이트 영상도 배포되었다.
김정은의 시각정치는 선대에 비해 스케일이 크고 감정에 더욱 호소한다. 김정은은 이날 외빈들과 연회장에서 실황을 시청하다 백두혈통을 상징하는 백마가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의 영상이 대형 전광판에 상영된 정각 오후 10시에 주석단으로 등장했다. 행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군중은 “결사옹위” “절대복종”을 외쳤다. 매스게임으로 일사분란하게 글자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정치적 스펙타클 행사를 통해 ‘단결’과 ‘중심 세력’을 시각화해서 대내외에 보여주는 것이다. 비 내리는 밤, 거리를 비추는 조명과 빠른 템포의 배경음악, 아나운서의 격정적인 나레이션은 감정을 자극하는 요소였다.
● ‘배우로 동원된 인민’ —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
이번 열병식의 상징 중 하나는 ‘비 속의 인민’이었다. 그들은 구경꾼이 아닌 배우로 동원된다. 김정은과 무기 행렬, 그리고 격정의 표정을 짓는 인민들은 모두 무대의 주인공인 셈이다. 김정은은 열병식 다음 날 참가자들을 다시 불러 모은 위문공연을 제공한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이 연설을 통해 “불리한 날씨 속에서도 완벽히 임무를 수행했다”고 언급했듯이, 빗속에 서 있는 군중은 곧 ‘충성의 미학’을 재현하는 역할을 했다.
북한의 영상 편집자들은 박수 치는 인민의 얼굴을 반복 삽입해 화면의 주목도를 높였다. 인민의 리액션과 얼굴 클로즈업 화면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기획이자 연출이다. 인민은 감정의 주체가 아니라 연출의 일부이며, 권력은 그들의 표정을 통해 체제의 감동 서사를 구축한다.
평소 아껴둔 양복과 한복을 차려입고 인공기와 꽃을 흔드는 그들의 모습은 ‘집단 미장센’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군중은 권력의 배경이자 장식물이며, 그들의 환호와 박수는 연출자의 서사를 완성시키는 리액션이다.
● ‘셀카가 없는 사회’ — 기억의 독점
그러다보니 일반적으로 현대 정치 스펙타클에서 등장하는 ‘셀카 찍는 시민’의 모습이 없다. 북한 주민들은 행사에 참여하더라도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거나 스스로를 기록하지 않는다. 개별의 기억보다 집단의 운집이 성공적으로 카메라에 담기는 것이 참가자의 임무다. 북한이 공개한 열병식 중계 화면 및 하이라이트 영상에서 스마트폰으로 행사와 참가자를 찍는 장면이 가끔 보이긴 한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외신 기자 또는 외국인들이다.
북한에서 김정은이 등장하는 모든 행사의 ‘기억의 주체’는 국가이다. 모든 장면은 국가가 촬영하고 국가가 배포한다. 북한의 개인은 자신을 기록할 권한이 없다. 개인의 기억과 체험은 공식 영상에 의해 대체되며, 이는 ‘기억의 독점’이자 통제의 완성이다.
● 김정은의 개인 SNS가 되어가는 노동신문
국가가 기록한 행사의 사진과 영상은 어떻게 세상에 전달될까? 레거시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달될 수 있는 시대에 각 나라의 정치 엘리트들은 당연히 두 가지 형태의 미디어를 활용하려고 한다.
김정은 집권 초기, 북한이 운영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인스타그램 계정이 있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이유는 사진의 내용과 업로드 속도, 영어 설명문의 수준이 북한 공식매체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22년 3월 25일 ‘화성 17호’ 발사 현장 사진을 끝으로 더 이상 게시물이 올라오지 않았다.
대신 김정은 정권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정치인과 대중을 연결하고 있다. 바로 레거시 미디어를 소셜미디어처럼 활용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미 신문·방송·인트라넷(광명망)·스마트폰이라는 폐쇄형 플랫폼을 장악했다. 주민들의 스마트폰 보유율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김정은은 사실상 ‘강제 구독형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는 셈이다. 북한의 뉴스 소비 환경에서 지도자의 이미지와 영상은 자동적으로 포워딩된다.
신문에서 하루 한 장의 사진으로는 부족하지만, 디지털 환경에서는 수십 장의 이미지를 배포할 수 있다.
그런데 북한은 디지털 환경의 이미지 배포 방식을 신문에서 사용하고 있다. 김정은이 직접 인스타그램을 하지 않아도, 기관지 『노동신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번 북한 노동당 80주년 열병식과 다음날 위문행사의 경우에도 100장에 근접한 숫자의 사진으로 보도되었다.
2025년 9월 3일 김정은이 중국에 의해 초대받아 참석했던, ‘중국 인민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시스트 전쟁승리(전승절)’ 행사를 보도하면서 다음날 『노동신문』은 1~3면에 걸쳐 46장의 사진을 게재했다. 정작 행사의 주체였던 중국의 기관지 『인민일보』 지면에 사진이 10장 내외에 불과한 것과 대비된다. 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지도자의 행보를 이렇게 많은 이미지로 보도하는 신문은 없다. 김일성·김정일 시대보다 김정은 시대의 시각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졌다.
텍스트보다 이미지가 소통의 주 도구가 되는 방식이 신문 지면에 적용되면서 노동신문은 요즘 ‘김정은의 인스타그램 계정’처럼 변하고 있다. 중단된 북한의 공식 인스타그램은 이제 신문 지면에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 결론 — 이미지가 곧 체제다
북한에서 ‘인민의 얼굴’은 존재하지만, ‘인민의 시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촬영자는 언제나 권력이고, 인민은 피사체일 뿐이다. 그러나 인민은 자신들이 주인공이라고 믿으며 카메라 앞에서 연기를 한다. 체제는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시각화한다.
북한에서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지배의 언어이며, 이미지가 곧 체제다. 김정은은 레거시 미디어를 장악해 그것을 개인의 소셜미디어처럼 사용하고 있다.
2018년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전날 밤, 김정은은 싱가포르 외교장관 등과 함께 ‘셀카’를 찍었다. 웃는 얼굴은 SNS를 통해 확산되며 ‘인간적인 지도자’ 이미지를 만들었다. 전 세계에서 보편화된 셀카는 개인의 기억이자 자유의 상징이다.
북한 주민들이 언젠가 스스로 ‘셀카’를 찍는 순간이 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변화의 신호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아직 그날이 요원해 보인다.
변영욱 동아일보 사진부 부장

사진 1= =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11일 당 창건 80주년 경축 열병식이 전날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히 거행됐다고 보도했다. 새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이 이날 처음 공개됐다. 평양= 노동신문 ·뉴스1

사진 2= 북한 당 창건 80주년 열병식을 취재하는 외신 기자들이 스마트폰으로 현장을 촬영하고 있다. 유튜브 캡쳐

사진3= 2025년 9월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에 참석한 김정은이 베이징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났다. 기사를 최소화하고 이미지로 김정은의 활동을 보도하는 노동신문.

사진4 =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12시간 앞둔 2018년 6월 11일 오후 9시경(현지 시간) 숙소를 벗어나 싱가포르 시내 관광에 나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가운데)이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싱가포르 외교장관(왼쪽), 옹예쿵 교육장관과 가든스바이더베이 공원 내 플라워돔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출처 비비안 발라크리슈난 트위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