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자유의 수호자들’(下)(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북한군이 서울에 들어온 뒤 시가 행진을 하고 있다.

▽ 6·25 전쟁을 함께 한 종군기자들

1950년 6월 25일 오전 8시 주한 미국 대사관 기자실. 한국 부임 11개월 가량된 UP 통신 잭 제임스 기자는 ‘인민군이 올해 가을까지는 공격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는 취지의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북한의 공격임박설이 끊이지 않아 그날 새벽에도 도쿄 맥아더 사령부의 정보부인 ‘G-2’에 근무하는 친구에게 전화했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그때 대사관 복도에서 황급히 오가는 한 정보관과 마주쳤다.

“무슨 일입니까?”

“망할 놈들, 8사단을 제외한 모든 전선에서 38선을 넘어온 모양이야?”

제임스는 기자실에서 1시간 반 가량 여기저기 전화를 돌렸다. 당시는 실제 싸움이 없는데 과장된 보고들도 많았다. 그는 아시아에서 오래 근무한데다 평소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인정을 받아 대사관에서 긴급히 열린 주한 미 군사고문단(KMAG) 회의에도 참석할 수 있었다.

한 장교가 (개전 소식을) 워싱턴에 급히 알려야 한다고 보고했다. 제임스는 회의가 끝나기도 전에 나와 긴급으로 송고했다. 6·25 전쟁 첫 외신 보도였다.(굴든, 55쪽)

냉전이 열전(熱戰)으로 전환되고 2차 대전 후 5년 만에 미국 소련 중공 등 강대국이 참전한 가운데 3년 여 계속된 6·25 전쟁의 현장에는 때로는 목숨을 건 많은 종군 기자가 있었고 특종도 쏟아졌다.

신화봉 기자의 ‘휴전선이 열리는 날’

맥아더 동행 기자보다 빨리 인천상륙 특종

AP통신의 신화봉 기자는 부산에 있으면서 인천상륙작전을 특종 보도했다. 1950년 9월 15일 오후 1시 50분 ‘유엔군이 오늘 아침 인천 월미도에 상륙했다…’는 뉴스를 맥아더 사령부가 공식 발표하기 9시간 전 부산발로 보도했다. 맥아더의 상륙작전에는 도쿄 사령부 출입기자들이 동행해 현장에도 있었으나 이들보다 부산에 있던 신 기자가 먼저 보도한 것이다.

정일권 소장은 후일 회고록 ‘전쟁과 휴전’(1986)에서 상륙작전 이틀 전 신 기자가 보도해 북한이 사전에 알았을 것이라고 적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자신은 미 제5 해병연대 정보통으로부터 듣고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사전보도하면 ‘이적행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기 때문에 실행된 후를 기다렸다고 밝혔다. 그는 인천상륙작전 작전 과정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되어 온 환자를 인터뷰하고 해군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으며 정일권 소장 명의를 빌려 보도하기 위한 노력 등을 기울였다고 자세히 소개했다.(신화봉, 132쪽)

정일권은 워커 미 8군 사령관이 참모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뒤 회의에 참석했던 K모 소령과 늦게까지 신 기자가 술자리를 하다 내용을 듣게 됐다고 했다. 정 총장 이름으로 발표한 것도 임의로 이름을 쓴 것이라며 옆에 있었으면 총을 빼들었을 것이라고 했다.(정일권, 131쪽) 하지만 신 기자는 2000년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 총장을 설득해 정 총장 이름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미 해병대원들이 알루미늄 사다리를 타고 항구의 벽을 올라가고 있다. 사다리는 일본에서 제작해 가져온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알고 보도 안한 기자들

인천상륙작전에서 9m 높이의 인천항 벽을 올라가는 것이 큰 과제였다. 사령부가 일본의 여러 공장에 200개의 알루미늄 사다리를 주문했다. 도쿄 사령부의 기자들은 인천에서 상륙 작전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사실을 외부로 누설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다고 맥아더의 대변인이었던 로우니는 밝혔다.(로우니, 71쪽)

맥아더 사령부 취재 기자들 사이에서 인천상륙작전은 (언제 실행되는 지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언젠가 할 것으로 예상한 ‘누구나 아는 작전’이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히긴스, 188쪽)

끊어진 대동강 철교 위로 피란민들이 아슬아슬하게 넘어오고 있다. 일부는 추운 겨울 강으로 빠져 떠내려갔다.

‘대동강 철교 폭파’ 사진 특종

6·25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진 중 하나는 ‘폭파된 대동강 철교’다. 이 사진을 촬영한 AP통신의 막스 데스포 기자는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데스포는 전쟁이 터진 1주일 후 급파돼 3년 동안 줄곧 한국전에 종군했다. 그는 1950년 11월 말 중공군 참전으로 후퇴하던 미군과 함께 움직일 때 수천 명의 피난민이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타고 넘어오는 장면을 찍었다. 이 사진은 미군이 1950년 12월 4일 다리를 폭파한 이후 남은 구조물로 아슬아슬하게 필사적으로 넘어오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많은 사람들은 물에 떨어져 떠내려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글쓰는 기자는 몇 명 있었지만 사진 기자는 자신 혼자였다고 했다. 날씨가 추운데다 적의 추격으로 오래 머무를 수 없어 잠깐 동안 찍은 8장의 사진 중 한 장이 부서진 철교 사진이었다.

경기도 오산의 ‘초전기념관’에 전시된 마가렛 히긴스의 사진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라면 내가 있을 이유가 없다”는 구절이 쓰여있다.

‘귀신잡는 한국 해병대’, 마거릿 히긴스

종군 여성 기자로 널리 알려진 미국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마거릿 히긴스는 개전 직후 도쿄에서 건너와 1950년 말까지 취재했다.

6월 29일 한강방어선을 둘러보고 도쿄로 돌아가는 맥아더의 전용기 바탄호에 동승해 맥아더로부터 ‘미 지상군 파병’ 얘기를 듣고 특종을 낚았다. 그는 인천상륙작전과 장진호 전투 등을 취재한 뒤 돌아가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을 집필해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그는 1950년 8월 17일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북한군 대대 병력을 섬멸하고 경남 통영을 탈환하자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기사를 써서 지금도 해병대 애칭으로 쓰인다.(‘1129일간의 전쟁’, 533쪽).

히긴스는 한국전쟁 보도에 대해 “준비 안 된 군대가 겪은 절망과 공포의 순간들을 사실 그대로 전해 이런 일이 다시 발생해서는 안된다는 여론을 미국내에 조성하는 것”이라고 했다.(히긴스, 135쪽)

6·25 개전 당시 육군본부 인사국장이었던 강영훈 전 국무총리는 남자 야전복을 입은 히긴스 기자를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김백일 군단장을 통해 한국군 전선을 둘러보고 싶다고 해서 안내를 하게 됐다. 히긴스를 대대본부로 데려갔더니 총격전이 벌어지는 일선을 보고 싶지 대대본부는 관심이 없다고 했다. 다시 500m 이상 전방 능선까지 가서 소대 병사들이 적을 향해 사격을 하는 곳으로 갔다. 히긴스는 병사에게 요즈음 무엇을 먹느냐고 물었다. 병사가 하루 세 끼 주먹밥 한 개씩을 먹는데 반찬은 소금이라고 대답했다. 더 필요한 것 없느냐고 묻자 “임무가 적을 격퇴시키는 것인데 개인적인 소원이 있겠느냐”고 해서 강 전 총리는 통역하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했다.(강영훈, 151쪽)

히긴스는 은퇴한 뒤 1965년 베트남을 여행하던 중 풍토병에 감염돼 치료받다 사망했다. 한국 정부는 2010년 히긴스의 딸 린다 밴더블릿씨에게 수교훈장 흥인장을 전달했다. 미국 정부는 군인도 아닌 그를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해 예우했다.

반공포로 석방 특종

UP 통신 이상규 기자는 1953년 6월 18일 새벽 부산 동래에서 일을 보고 부산으로 나오다 포로들의 탈출 광경을 목격했다. 서울 취재본부인 내자아파트에 전화를 기사를 불러 5시 40분 경 1보가 타전됐다. 이날 부산 마산 광주 논산의 포로수용소에서 반공 포로 석방이 개시된 것은 오전 2시경이어서 3시간이 채 되지 않아 첫 보도가 나갔다.(이용호, 117쪽)

아이젠하워 극비 방한 스토리로 퓰리처상

1952년 11월 한국 전쟁의 명예로운 종식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당선되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그해 12월 2일부터 5일까지 극비 보안속에 한국에 왔다. 수행 기자는 6명이었는데 기자들은 가족들에게도 출장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다. 기사는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떠난 후 보도하도록 했다.

동행 기자 중 AP통신의 돈 화이트헤드 기자는 아이젠하워의 극비 방한 기사 ‘거대한 속임수(the great deception)’로 1953년 국내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았다.

‘1952년 11월 29일 새벽 5시 30분, 두 사나이가 뉴욕의 모닝 사이드 드라이브 60번지 저택문을 통해 별이 총총한 차가운 밤거리로 급히 걸어나왔다. 추위를 막으려는 듯 코트깃을 세운 그들이 근처에 대기하고 있던 리무진에 재빨리 오르자 차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두 사람 중 하나는 비밀경호원 에드워드 그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대통령 당선자 아이젠하워 장군이었다.’

‘평화 열차(peace train)’ 휴전협상 취재

판문점 휴전회담을 위해 유엔군 대표단 숙소 및 지원시설을 갖춘 전방기지가 문산역 인근에 설치돼 ‘문산 베이스 캠프’라고 불렀다. 문산역 구내에는 11개의 객차 침대차 식당차 조리실로 구성된 유엔측 기자들의 전방취재 공간이 마련됐는데 이를 ‘평화 열차’라고 불렀다. 서울 내자(內資) 아파트에는 각 외신 언론사의 사무실이 있어 두 곳이 휴전회담 취재의 두 포스트였다. 한국 전쟁 중 이 두 곳을 거친 외신기자는 500명 이상이었다.

내외신 기자들은 서울에서 문산까지는 각 자의 지프차, 문산에서 판문점은 헬기를 타고 다녔는데 회담 초기에는 평화열차에서 숙식을 하다, 회담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관심이 많이 줄었다.(이용호, 109쪽)

경기도 파주 통일공원의 순직 종군기자 추념비. 파주 = 홍진환 기자

6·25 전쟁 순직 종군기자 18명

한국기자협회는 6·25 전쟁을 취재하다 순직한 한규호 서울신문 기자 등 국내외 기자 18명(국내 1명, 외국 17명)의 추념비를 건립했다. 전국 일선기자들의 성금과 사회 각계 지원을 받아 1977년 4월 27일 파주 통일공원 내에 추념비를 마련하고 매년 추도식을 갖고 있다.

최기원 홍익대 교수가 설계한 추념비는 타자기 모양의 화강암으로 된 받침대 위에 저널리스트의 머리글 ‘J’자를 본 딴 텔리타이프 종이가 높이 솟은 형상이다. 추념비 윗부분에는 승리의 월계수와 기자정신을 상징하는 펜을 쥔 손, 한국전쟁을 뜻하는 지구가 조각돼 있다.

한규호 기자는 개전 직후 북한군이 국군 복장과 견장으로 위장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 서울에 남아있던 한 기자는 신문 보도로 이름이 알려져 북한군에 체포돼 피살된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 문헌>
남정욱 지음, 『밴플리트 대한민국의 영원한 동반자』, 백년동안, 2014.
백선엽 지음, 『군과 나』, 서울: 시대정신, 2009.
백선엽 지음, 유광종 정리, 『백선엽의 6·25 전쟁 징비록』 2권,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 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최상진 지음, 『영원한 친구들』, 한미우호협회, 2022.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