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포커스

제목“안전 보장 없는 휴전 없다”(2)[정전 70년, 끝나지 않은 6·25]
이승만 하야 작전 ‘에버레디 계획’

스탈린 사후 휴전회담은 1953년 6월 8일 ‘포로의 자발적 송환에 입각한 중립국 송환위원단 관련 협정’ 체결까지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에 함께 이승만의 휴전 반대도 더욱 거세졌다. 국군이 독자 행동을 하겠다는 것에서 나아가 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 석방 엄포까지 점차 수위가 높아졌다. 이승만의 강경 자세를 꺽고 설득하기 어렵다고 본 미국은 유엔사령부에 의해 주도되는 ‘에버레디 계획(Plan EverReady)’을 세웠다.

이는 이승만의 반대 속에 정전협정이 타결됐을 때 ① 한국군이 유엔군의 지시를 듣지 않거나 ② 독자 행동을 하거나 ③ 유엔군에 공공연하게 적대적이 되는 경우에 대비한 유엔군의 행동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불복종하는 한국의 군부 및 민간 지도자를 감금한 뒤 유엔군 군정을 실시한다는 것이 골자다. 체포 대상 민간 지도자에는 이승만 대통령도 포함된다. 유엔사령부 이름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부 또는 민간 지도자 중 명령 불복하는 자들을 감금하며, 유엔사에 의한 군사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남시욱, 66쪽)

이는 1952년 7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클라크 사령관이 입안했다가 여야 타협으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돼 실행하지 못한 ‘이승만 정부 전복 계획’을 보완한 것이다.

미 국무부는 “우리 자신을 침략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며 대신 방위조약을 체결해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냈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5월 30일 미국·필리핀 방위조약이나 호주 뉴질랜드와 맺은 엔저스(ANZUS) 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맺는 것으로 이승만 달래기에 나서면서 이승만 하야 계획에서는 물러섰다.

부산 서구 임시수도기념로의 ‘임시수도 대통령관저’. 이승만 대통령은 전쟁 발발 2개월 가량 후인 8월 18일부터 정전 협정으로 서울로 돌아가기 전까지 이곳에서 집무를 보았다. 이곳은 1920년대 일제하에서 경남지사의 관저로 지어진 건물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이승만의 초강수, 반공포로 석방

휴전협정 체결이 진전되면서 한국내 휴전 반대 분위기도 높아졌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국회는 129대 0으로 반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급기야 이승만은 6월 18일 반공포로를 예고없이 석방했다. 부산 거제 등 전국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한 밤중에 대탈주가 벌어졌다. 3만 5천여명의 반공포로 중 2만7388명이 4일에 걸쳐 석방됐다. 연초부터 원용덕 헌병총사령관을 시켜 은밀히 포로석방계획을 준비하다 결행한 것이다. 반공포로 석방 과정에서 포로 56명이 사망하고 81명이 부상했다. 아이젠하워는 유엔사령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공개된 무력행사라고 비판하면서 군대를 한국에서 철수할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클라크는 휴전 협정 체결이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나온 반공포로 석방에 당혹해 하면서도 한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았다고 자세히 기록했다. 국민들이 탈출한 포로들을 모두 숨겨주고 음식과 술 담배를 제공하는가 하면 한국 경찰들은 탈출한 포로를 검거하려는 미국 병사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경계를 했다는 것이다.(클라크, 467쪽)

반공포로 석방은 공산측이 유엔군 포로를 석방하지 않고 맞대응하면 협상을 파탄낼 수도 있는 빌미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협상은 더 이상 궤도에서 이탈하지는 않았다. 반공포로 석방을 유엔군사령부와 한국이 공모했다고 공격하고 유엔군이 한국군을 통제할 수 있는지 문제 삼았지만 협상 열차를 멈추게는 하지 않았다.

부산 임시수도 대통령 관저의 집무실의 이승만 대통령. 문뜩 방문을 지나다 보면 실제로 앉아있는 느낌을 줄 정도로 생생하고 자연스런 모습이다. 부산 = 구자룡 기자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왼쪽에서 두 번째). 출처 영문위키.

클라크의 이승만 존경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이 도드 포로수용소장을 억류한 날인 1952년 5월 7일 유엔군사령관으로 도쿄에 부임한 클라크 사령관의 가장 큰 임무는 휴전 협상의 마무리였다. 협상은 공산측의 갖은 잔꾀와 선전술, 터무니없는 지연작전 등으로 진행이 더뎠지만 넘어야 할 또 하나의 큰 관문은 ‘이승만과 한국 국민의 반대’였다.

미군 사령관으로서 워싱턴의 지시와 훈령을 받아 협상을 진행시켜야 할 임무를 띤 클라크였지만 이승만과 한국민의 휴전 반대 심정과 논리를 누구보다 이해하고 마음으로는 동조했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승만을 존경하는 마음이 곳곳에 묻어있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불신, 압록강 북쪽에 중공군의 병참기지를 손보지 않고는 승리할 수 없다는 맥아더의 확전론을 확고히 지지하는 것도 이승만과 결이 같았다.

클라크는 ‘이승만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이라며 아시아 모든 비공산 국가들의 뿌리깊은 안전 보장에 대한 열망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지도자라고 했다. 이승만은 한국 전쟁을 통해 장제스(蔣介石) 총통과 인도 네루 수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한 ‘아시아의 별’이라고도 했다.(클라크, 272쪽) 클라크는 “역사는 앞으로 이승만이 한국 전쟁에서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것이 휴전을 앞세운 미국의 주장보다 더 정당했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할 정도였다.(클라크, 19쪽)

월터 로버트슨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왼쪽)가 정전 협정 서명 한 달여를 앞둔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해 이승만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10대 강국의 초석 ‘한미동맹조약’

미국은 이승만이 가장 우려하는 휴전 후의 안보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동맹 협상’, 이른바 ‘소 휴전회담’을 통해 이승만의 반대가 장애가 되지 않고 휴전회담이 무사히 마무리되도록 했다. 휴전 협정 서명 한달여 전인 6월 25일 서울에 도착한 로버트슨 국무부 차관보는 7월 12일 출국하기 전까지 한국에 머물며 12차례에 걸쳐 주로 이승만 대통령과의 담판을 통해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이 휴전에 동의하면서 얻어낸 합의사항은 △상호방위조약 체결 △2억 달러 제공 및 장기 경제원조 △한국군 40개 사단 증강 등이었다.

클라크는 공산측의 침략이 있을 경우 미국이 다시 오는 내용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군 배치 및 전략에 관한 계획(JOEWP)’에 맞지 않는다며 반대했었다. 트루먼 후임으로 당선된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한미간 상호방위조약은 유엔이 비효율적인 기구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며 조약 체결에 부정적이었다. 한미간에 조약이 체결되면 일부 참전국이 군사 개입을 축소하려 할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베트남은 휴전협정을 맺고 2년 뒤 공산화됐다. 이승만은 ‘협정’이 종이조각에 그치지 않는 안보 방패막이로 만들면서 비로소 휴전 반대를 접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휴전협정 체결 후인 8월 방한해 “조약은 한국이 공격을 받으면 홀로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록할 것이며 적에게 미국이 할 일을 할 것이라는 명백한 통고를 하는 것”이라고 10월 1일 체결될 조약의 취지를 설명했다. 이는 조약에서 “외부의 무력 공격에 대한 공동의 방위 결의를 공개적이고 정식으로 선언해 어떤 잠재적 침략자도 당사국 중 어느 한 국가가 고립하여 있다는 환각을 갖지 못하게 한다”고 조항으로 명문화됐다. 조약은 이듬해 11월 비준서 교환으로 발효됐다. 6·25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과 세계 10대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 한데는 한미동맹이라는 안보 울타리가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조이 제독이 지적한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과 협상 요령

터너 조이 제독. 출처 영문위키

공산주의자들의 협상 전술

➀회담에 유리한 장소 선정과 분위기 조성
➁장기 담판에 대비 계급보다 능력위주의 회담 대표단 구성
➂원하는 결론으로 가도록 속임수가 있는 의제 설정
➃협상에 유리한 사건을 중간에 모의하고 촉발시킴
➄지연전술로 상대의 조급증 유도, 서방의 인도주의 악용
➅약속 후 검증을 거부하는 방법 모색
➆협정 실행 중 ‘거부권’ 확보해 필요시 이행 회피
➇‘가짜 쟁점’ 끼워 넣어 다른 목적 확보용으로 거래
➈부력(浮力)있는 진실은 부인보다 왜곡 선호
➉상대가 양보하면 약점으로 알고 더욱 강한 요구
⑪불리한 합의는 자의적 해석으로 부인 회피
⑫같은 요구 되풀이해 피로하게 함

공산주의자와의 협상 요령

①정전을 요청해도 압력을 낮추지 마라
②회담 시한을 설정해 지연전술에 끌려가지 말아야 한다
③회담 장소를 결정하게 하면 오만해진다
④회담 제안에 서둘러 응하지 마라
⑤최고의 협상팀을 구성하라
⑥일방적 양보 아닌 댓가를 받아내라
⑦서두르지 마라
⑧의제에 함정이 있는지 살펴라
⑨말을 많이하면 표적만 제공한다
⑩목적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정해놓고 회담해야 한다
⑪전쟁 피하려면 전쟁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⑫협상할 때는 힘을 배경으로 하지말고 사용해야 한다

출처 : ‘공산주의자는 어떻게 협상하는가’

참고 문헌
김철수 지음, 『그 때는 전쟁, 지금은 휴전 6·25』, 플래닛 미디어, 2017.
김계동 지음, 『한국전쟁 불가피한 선택이었나』, 명인문화사, 2014.
남시욱 지음, 『한미동맹의 탄생 비화』, 청미디어, 2020.
마크 W. 클라크 지음, 김형섭 옮김,『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국제문화출판공사, 1981.
선즈화(沈志華) 지음, 김동길 옮김,『조선 전쟁의 재탐구』, 도서출판 선인, 2014.
알렉산더 판초프 지음, 심규호 옮김,『마오쩌둥 평전』, 민음사, 2017.
와다 하루키 지음, 남상구 조윤수 옮김, 『한국전쟁 전사』, 청아출판사, 2023.
정일화 지음, 『휴전회담과 이승만』, 선한약속, 2014.
훙쉐즈(洪學智) 지음, 홍인표 옮김, 『중국이 본 한국전쟁』, 한국학술정보, 2008.
『정경문화』 이용호, 1983년 7월호

구자룡 화정평화재단 21세기평화연구소장 bonhong@donga.com